김세열은 일제강점기, 경기도 수원군 향남면 발안에서 일어난 독립만세운동에 참가한 독립운동가이다. 수원군 팔탄면 고주리에서 태어났으며, 향남면 발안장터 만세운동을 주도한 김성열의 동생으로 발안 장터 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 1919년 4월 15일 제암리 학살사건을 저지른 일본 수비대에 의해 고주리에서 김세열을 포함한 일가족 6명은 무참하게 살해되어 순국하였다.
형 김성열은 안종후(安鍾厚) 등과 서울의 만세운동에 참가한 후 돌아와 장안면 수촌리의 백낙렬(白樂烈), 향남면 제암리의 안종후 등과 만세운동을 준비하였다. 3월 하순부터 시작된 화성 지역 만세운동은 일본인 경찰 2명을 처단할 만큼 격렬한 양상이었다.
향남면 발안 장터에서 일어난 만세시위는 면사무소와 발안주재소를 습격하여 일제 경찰과 투석전을 전개하였다. 김세열은 형과 함께 발안 장터 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 당황한 일제는 경찰과 군대를 증파하여 이 일대 촌락 방화와 아울러 한국인에 대한 체포, 고문 등 대대적인 보복에 나섰다.
4월 15일 오후 2시경에 일본군 아리타 도시오[有田俊夫] 중위가 인솔한 10여 명의 군경이 제암리에 도착하였다. 주민들에게 전달할 사항이 있다고 속이고 주민들을 제암리교회에 모이게 하였다. 주민들이 교회 안으로 들어가자 아리타는 출입문과 창문을 모두 잠그고 집중사격을 명령하는 동시에 불을 놓아 교회를 태워버렸다. 이때 주민들 23명이 교회 안에서 무고하게 학살, 희생되었으나 유해는 군경의 방해로 가족조차 접근할 수 없었다.
이어 고주리로 이동한 일제 군경은 김세열 일가 6명을 검거하여 학살한 후 시신마저 불태웠다. 선교사 스코필드(F. W. Schofield)는 시신을 수습하여 공동묘지에 안장하였다. 특히 이 사건의 참혹한 현장을 사진과 기록으로 남겨 일제의 야만적인 탄압의 실상을 온 천하에 폭로함으로 세계적인 주목을 받았다.
1968년 대통령표창,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