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흥렬은 일제강점기, 경기도 수원군 향남면 발안에서 일어난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한 독립운동가이다. 천도교 전교사와 순회교사로서 청년들에게 항일의식을 일깨웠다. 3 · 1운동 소식을 접하고 발안 장터 만세운동을 계획하였다. 1919년 3월 31일 가족 6명이 마을 주민들과 만세운동에 참가하였고, 이후 검거되어 고문을 당한 후 풀려났다. 4월 15일 제암리 학살사건을 저지른 일본 수비대에 의해 고주리 김흥렬 일가 6명은 무참하게 살해당하였다.
경기도 수원군 팔탄면 고주리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통정대부(通政大夫)를 지낸 김충식(金忠植)이다. 동생으로는 김성열(金聖烈) · 김세열(金世烈)이 있으며, 함께 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
1884년경 동학에 입교하여 1894년 백낙렬(白樂烈) 등과 농민군을 모집하여 수원 접주(接主) 고석주(高錫柱) 휘하에서 활동하였다. 천도교 전교사로 고주리와 제암리 교인들에게 교리를 가르쳤으며, 수원교구 순회교사가 되었다. 중앙총본부에 독립운동 자금을 제공하면서 주변 청년들을 규합하여 항일단체인 구국동지회(救國同志會)를 조직하는 등 항일의식을 일깨웠다.
화성 지역 3 · 1운동은 향남면 발안 장터에서 격렬하게 전개되었다. 3월 31일 오전 김흥렬 일가 6명과 마을 주민 20여 명은 발안 장터를 향해 출발하여 12시경에 도착하였다. 안정옥(安政玉)이 이끄는 제암리 주민들도 발안주재소 앞에 모여들었다. 이때 이정근(李正根)은 군중 속에서 앞으로 나와 독립만세를 외쳤다. 800여 명으로 늘어난 시위 군중은 이에 화답하며 행진을 하다가 주재소를 향해 투석전을 전개하였다.
4월 5일 향남면 발안 장날에는 1,000여 명의 시위 군중이 태극기를 앞세우고 장터를 행진하였고, 면사무소와 발안주재소를 습격하는 등 일제 식민기관에 직접 타격을 가하였다. 당시 수원 지역 만세운동은 일본인 경찰 2명을 처단할 만큼 격렬한 양상을 보였다. 일본 수비대는 총칼로 시위대를 진압하였다.
수비대가 위기에 몰린 상황에서 도착한 증원군 1개 소대는 곧바로 시위 군중에게 무차별로 사격하였다. 시위 군중을 이끌던 이정근은 현장에서 즉사하고, 많은 사람들이 부상 후유증으로 불구되거나 사망하였다. 이후 일본 경찰은 고주리 일대를 포위하고 주동자를 색출, 검거하여 가혹한 고문을 가하였다. 김흥렬은 발안주재소를 거쳐 수원경찰서에서 고문을 받은 후 풀려났다.
4월 13일 발안에 도착한 일본 수비대는 만세시위 관련자를 검거하는 등 공포 분위기를 조성하였다. 4월 15일 오후 2시경에 제암리 학살사건을 저지른 일본 수비대는 고주리로 이동하여 김흥렬 일가족 6명을 잔인하게 학살한 후, 시신마저 불태웠다.
마을 주민들은 3일 지난 후에야 겨우 시신을 수습하여 공동묘지에 안장할 수 있었다. 이와 같은 만행은 4월 17일 캐나다 선교사 스코필드(F. W. Schofield)가 현장을 찾아 참상을 촬영하는 동시에 보고서를 기록함으로써 일제의 천인공노할 죄상은 만천하에 알려졌다.
1968년 대통령표창,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