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주남은 일제강점기, 경기도 수원군 향남면 발안에서 일어난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한 독립운동가이다. 1895년 수원군 팔탄면에서 태어났으며, 큰아버지는 화성 지역 천도교 지도자 김흥렬, 중부는 구국동지회(救國同志會)를 조직한 독립운동가 김성열이다. 3월 31일 발안 장터 만세시위를 시작으로 온 가족이 동참하는 등 분위기를 고조시켰다. 이후 체포되어 온갖 고문을 당하다가 풀려났다. 제암리 학살사건 이후 고주리에서 김주남 가족 6명이 일본군에게 무참히 살해되었다.
경기도 수원군 팔탄면 고주리에서 1895년 10월 20일 태어났다. 할아버지는 통정대부(通政大夫) 김충식(金忠植), 큰아버지는 화성 지역 천도교 최고지도자인 김흥렬(金興烈)이다. 중부(仲父)는 김성열(金聖烈), 아버지는 김세열(金世烈)이다.
수원군 향남면 제암리에서는 3월 10일경 안종린(安鍾麟), 안정옥(安政玉) 등이 독립선언서와 격문 등을 입수하여 3월 25일 동네 뒷산에서 독립만세를 외쳤다. 이어 김주남과 주동자들은 4월 5일 발안 장날을 이용하여 다시 만세시위운동을 하기로 결의하였다.
3월 31일 오전 큰아버지와 함께 마을 주민들과 발안 장터로 출발하였다. 분위기가 심상치 않자 한국인 순사보는 수원경찰서에 지원을 요청하였다. 발안 장터에 모인 시위대는 순식간에 800여 명으로 늘어나는 등 자못 긴장감이 감돌았다.
4월 5일 향남면 발안 장날에는 1,000여 명의 시위 군중이 태극기를 앞세우고 장터를 행진하였고, 면사무소와 발안주재소를 습격하는 등 일제 식민기관에 직접 타격을 가하였다. 당시 수원 지역 만세운동은 일본인 경찰 2명을 처단할 만큼 격렬한 양상을 보였다. 일본 수비대는 총칼로 시위대를 진압하였다.
일제는 경찰과 군대를 증파하여 이 일대 촌락과 한국인에 대한 방화, 체포, 고문 등을 하면서 대대적인 보복에 나섰다. 4월 9일 이후 수비대는 시위 참가자들을 대대적으로 검거하여 김주남은 아버지, 형제와 같이 체포되어 수원경찰서에 끌려가 혹독한 고문을 받고 풀려났다.
4월 13일 아리타 도시오[有田俊夫] 중위가 이끄는 보병 13명은 발안에 도착하였다. 일제 수비대는 순사보 조희창(趙熙彰)과 일본인 사사카[佐坂] 등의 안내를 받아 4월 15일에 제암리 학살사건을 저질렀다.
학살을 자행한 수비대는 옆마을인 고주리로 이동하였다. 일본군은 김주남 일가족 6명을 끌고 가 살해한 후, 시신마저 불태웠다. 3일이 지난 뒤에 마을 주민들은 겨우 시신을 수습하여 월문리 공동묘지에 안장하였다. 제암리, 고주리, 수촌리 만행은 선교사 스코필드(F. W. Schofield)에 의해 만천하에 알려졌다.
1968년 대통령표창,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이E0031610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