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헌은 일제강점기, 경기도 수원군 향남면 발안에서 일어난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한 독립운동가이다. 향남면 제암리에서 태어나 동학에 입문하여 농민운동에 참여하였다. 천도교인에서 기독교인으로 개종한 후, 청년들 모아 개혁운동을 도모하였다. 1919년 4월 5일 발안 장터에서 시위행진을 하였고 시위가 격렬하게 전개되자 일본군은 4월 15일 제암리, 고주리, 수촌리 등지에서 학살을 저질렀다. 이때 김정헌은 제암리교회 현장에서 순국하였다.
수원 지역에서 만세운동이 확산되는 가운데 4월 3일 우정면 화수리와 장안면 수촌리 일대에서 차희식(車喜植), 차인범(車仁範), 이봉구(李鳳九) 등은 1,500여 명 시위군중과 함께 만세를 부르는 한편, 면사무소와 경찰주재소를 공격하였다.
김정헌은 안상용(安相容), 안진순, 강태성(姜太成), 김덕용(金德用) 등과 4월 5일 발안 장터 시위행진을 주동하였다. 이날 1,000여 명의 시위 군중과 함께 태극기를 앞세우고 장터를 행진하였고 발안주재소를 공격하였다.
일본 경찰의 무차별 발포로 3명이 부상하였다. 분노한 시위 군중은 투석으로 대항하여 일본인 순사부장이 죽고, 많은 일본인 거주자들도 부상하였다. 당시 만세운동은 일본인 경찰 2명을 처단하는 등 격렬하게 일어났다.
일제는 경찰과 군대를 증파하여 이 일대 촌락과 한국인에 대한 방화, 체포, 고문 등 대대적인 보복에 나섰다. 일본 헌병과 경찰로 구성된 혼성부대는 시위대를 해산하는 한편, 지도자를 검거하였다. 지휘관 아리타 도시오[有田俊夫]는 수촌리 일대를 포위하고 대대적으로 수색하면서 가옥을 불태우는 보복을 저질렸다.
수촌리와 화수리 일대에서 대대적인 토벌을 벌인 후, 4월 15일 오후 2시경 제암리로 간 수비대는 마을 주민들을 제암리교회에 모이도록 하였다. 수비대는 교회를 방화하는 가운데 무차별적인 총격을 가하여 23명을 학살하였다. 이때 김정헌도 제암리교회 현장에서 순국하였다. 이어 고주리에서도 김흥렬 일가 6명을 학살하는 사건을 저질렀다.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