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화성 향남읍 제암리 출신.
한말 군인으로 1907년의 군대해산에 반대하여 일본군과 직접 대결하다가 부상하여, 고향인 제암리로 내려와 김성렬(金聖烈)·안종후(安鍾厚) 등과 구국동지회를 조직하여 활약하였다.
이 사실을 수사하기 위하여 파견된 일본헌병 2명을 살해하고 피신생활을 하던 중 3·1운동을 맞았다. 4월 5일 발안 장날을 이용하여 안상용(安相容)·안진순(安珍淳) 등 1,000여 명의 군중과 함께 만세운동을 전개하였는데, 일본경찰의 무차별 사격으로 3명이 부상하였다.
이에 군중이 격노하여 투석으로 맞서 순사부장을 살해하였다. 이 후 수원에서 많은 헌병과 경찰이 파견되어 대대적인 검거작업을 벌였는데, 이 때 수원경찰서에 연행되어 모진 고문을 당하고 석방되었다. 그 뒤 제암리 일대는 일본헌병과 경찰에 의한 삼엄한 경비 속에 있었다.
4월 15일 오후 2시경 일본군 중위 아리타[有田俊夫]가 인솔한 군경이 제암리에 도착, 민간인에게 알릴 일이 있다고 속여 기독교인·천도교인 30여명을 제암리 교회에 모이게 하였다. 잠시 뒤 농민들이 교회에 집합하자, 아리타는 출입문과 창문을 잠그게 하고 집중사격을 명하였다.
이때 교회 안에서 죽은 사람이 22명, 뜰에서 죽은 사람이 6명이었는데, 그도 아내와 함께 순국하였다. 이 만행은 외국 선교사들의 분노를 샀는데, 특히 스코필드(Schofield, F. W.)는 현장사진을 찍어 미국으로 보내기도 하였다.
1968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