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원 지역의 3 · 1운동은 3월 중순경부터 본격화되었다. 3월 16일 천도교는 수원면 북수리 천도교 전교실에서 주요 임원들이 모여 만세시위와 독립운동비 모금 등 구체적인 계획을 마련하였다.
이때 일제는 북수리 천도교 교구실에서 만세시위를 준비한다는 소식을 정탐하고, 소방대와 일본인을 동원하여 전교실(傳敎室)에 난입해 회의 중인 천도교인들을 마구 구타하였다. 이에 안종환(安鍾煥), 안종린(安鍾麟), 이병헌(李炳憲)을 비롯한 10명 가까운 임원들이 중상을 입었다.
안종린과 안종환이 회복되면서 만세시위 준비를 마쳤고, 우정면과 장안면의 연합 만세운동은 4월 1일 저녁 9시경 장안면 수촌리 개죽산 봉화를 신호로 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리고 4월 3일과 5일은 발안 장날을 이용하여 더욱 격렬해졌다.
그러자 일제는 3 · 1운동의 주동자 수색과 체포를 구실로 살인, 방화, 구타를 일삼았다. 4월 2일부터 14일까지 8개 면 29개 마을에서 소실된 가옥이 348호, 사망자 46명, 부상자 26명, 검거 인원 442명에 이른다. 이러한 일제의 폭력적 대응과 탄압이 극에 달한 것이 제암리 학살이다. 4월 13일 일제는 육군 보병 79연대 소속의 중위 아리타 도시오[有田俊夫]가 이끄는 보병 13명을 발안에 불러들였다.
발안 내 다른 지역의 시위 주도자들은 2차에 걸친 검거 작전으로 대부분 체포되었지만, 발안 시위를 주도하였던 제암리 주도자들을 체포하지 못하자 아리타는 제암리 진압을 시작하였다.
4월 15일 아리타는 부하 11명과 순사 1명, 순사보 조희창(趙熙彰)과 사사카[佐板] 등의 안내를 받으며 제암리에 내습하였다. 그리고 3 · 1운동의 주동자였던 천도교와 기독교도 30여 명을 제암리 교회에 모아놓고 방화와 총격을 가하였다. 이때 안종린도 현장에서 불에 타서 순국하였다.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