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종엽은 일제강점기, 경기도 수원군 향남면 발안에서 일어난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한 독립운동가이다. 1919년 3월 중순부터 수원 지역에서 전개된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 수원 지역은 천도교 조직을 중심으로 만세운동이 전개되었다. 면사무소와 주재소가 파괴되고 일본 순사가 피살되는 등 시위가 격렬해지자, 일제는 대대적인 진압작전을 펼쳐 4월 15일 시위 주동자를 제암리 교회에 몰아넣고 학살과 방화를 자행하였다. 이때 안종엽도 아버지 안정옥과 함께 순국하였다.
수원의 우정면과 장안면을 중심으로 한 3 · 1운동은 1919년 4월 1일 밤 7시 장안면 수촌리 개죽산의 봉화를 신호로 하여 시작되었다. 우정면과 장안면은 열악한 소작농이 대부분으로서 일제의 폭정에 시달리고 있었으며, 일제의 경제적 침략으로 강한 반일 감정을 품고 있었다.
4월 3일 오전 11시 조선 민중들은 수촌리 천도교 전교실(傳敎室)에서 만든 태극기와 깃발을 들고 쌍봉산에 1,000여 명이 군집하여 만세를 부르고 독립의지를 불태웠다. 그리고 우정면으로 가서 면사무소를 파괴한 뒤, 화수리 주재소로 몰려가 독립만세를 불렀다.
이때 순사 가와바타 도요타로[川端豊太郞]가 도망가며 쏜 총에 천도교인 여러 명이 피격되었고, 이에 격분한 민중들에 포위된 가와바타는 처단되었다. 그에 대한 보복으로 일제는 살인, 체포, 고문, 방화, 구타, 그리고 종교시설뿐만 아니라 촌락의 대부분을 소각하는 악행을 저질렀다.
4월 13일 일본군 육군 보병 79연대 소속의 중위 아리타 도시오[有田俊夫]가 보병 13명을 이끌고 발안으로 들어왔다. 발안 내 다른 지역의 시위 주도자들은 2차에 걸친 검거 작전으로 대부분 체포된 상태였지만, 발안 시위를 주도하였던 제암리 주도자들을 체포하지 못하자 아리타는 제암리 진압을 시작하였다.
4월 15일 아리타는 부하 11명과 순사 1명, 순사보 조희창(趙熙彰)과 사사카[佐板] 등의 안내를 받으며 제암리에 도착, 3 · 1운동의 주동자였던 천도교와 기독교도들을 제암리 교회에 몰아넣고 방화와 총격을 가하였다. 이때 안종엽(安鍾燁)도 아버지 안정옥과 함께 순국하였다.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