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정옥은 일제강점기, 경기도 수원군 향남면 발안리에서 전개된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한 독립운동가이다. 1919년 3월 수원군 향남면 발안리에서 일어난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 천도교의 지도자로서 1919년 3월 25일과 4월 3일의 만세시위에 참여하였다. 일경과의 충돌로 일본 순사가 피살되는 등 시위가 격렬해지자 일제는 대대적인 진압작전을 펼쳐, 4월 15일 제암리 교회에서 주동자를 학살하고 불을 지르는 등 만행을 저질렀다. 이때 제암리 교회에서 순국하였다.
수원 지역의 3 · 1운동은 조직적이고 치열하였는데, 이는 당시 수원 지역의 천도교 조직이 막강하였기 때문이다. 일찍이 천도교는 1914년 대교구를 설립할 때 수원교구를 대교구로 승격하였다. 원래 교구는 교도(敎徒)가 100호 이상 되는 구역에 설치하였고, 교구가 10개 이상 되는 곳에 대교구를 설치하였다.
3 · 1운동 당시 수원이 대교구였다는 사실로 미루어 보면 수원의 천도교 가호(家戶)는 적어도 1,000호 이상을 훨씬 넘었을 것이다. 당시 수원 지역의 3 · 1운동은 3월 16일 수원면 북수리 천도교당에서의 만세운동 준비와 조직 계획을 시발로 하여 본격화되었다. 4월 초에는 향남면 발안 장날 만세운동과 주재소 습격으로 절정에 달하였다.
안정옥(安政玉)은 4월 3일 향남면 발안리 장날을 이용하여 안진순(安珍淳), 김덕용(金德用), 안상용(安相容), 강태성(姜太成) 등과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 그는 1,000여 명의 민중들과 함께 태극기를 앞세우고 장터를 행진하였는데, 일본 경찰과 충돌하여 그들의 무차별 발포로 3명이 부상하였다.
이에 분노한 조선 민중들은 투석으로 대항하였고, 이 과정에서 일본 순사부장이 돌에 맞아 죽었다. 이에 일제는 일본 경찰과 헌병대를 대량으로 증파하여 닥치는 대로 체포하고 고문하며, 살인과 방화를 자행하였다.
4월 15일에는 일본군 중위 아리타 도시오[有田俊夫]가 이끄는 약 20명가량의 군경이 제암리에 내습하여, 조선인들에게 알릴 일이 있다고 속여 천도교와 기독교 주동자 30여 명을 제암리 교회에 모이게 하였다. 주동자들이 모이자 아리타는 방화와 사격 명령을 내려 그 자리에서 주동자들 모두 학살하였다.
한 연구에 의하면 제암리 교회 학살사건에서 희생당한 사람은 천도교인 25명, 기독교인 12명이라는 주장이 있다. 안정옥도 당시의 학살 현장에서 순국하였다.
1915년 『천도교회월보(天道敎會月報)』 11월호에 「종교는 단체력소성(團體力所成)」이라는 글을 발표하였다.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