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유순은 일제강점기, 경기도 수원군 향남면 발안리에서 전개된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한 독립운동가이다. 1919년 3월 중순부터 수원군 향남면 발안에서 전개된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 면사무소가 파괴되고 일본 순사가 피살되는 등 시위가 격렬해지자 일제는 대대적인 진압작전을 펼쳐 4월 15일 제암리 교회에서 마을 주민을 학살하고 불을 지르는 등 만행을 저질렀는데, 그때 제암리 교회에서 순국하였다.
장안면과 우정면의 3 · 1운동은 천도교 백낙렬(白樂烈), 김성열(金聖烈) 그리고 기독교 안종후(安鍾厚) 등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이들은 서울에서 3 · 1운동이 일어나자, 서울로 올라와 직접 만세시위에 참가하고 귀향하여 만세운동을 준비하였다. 본격적인 만세시위는 발안 장날을 이용하여 전개되었는데, 이는 3월 중순부터 시작되어 4월 3일과 5일 최고조에 이르렀다.
우정면, 장안면을 포함한 남양 지역 인민들은 열악한 소작농의 처지였을 뿐만 아니라, 일제의 강압으로 바닷가의 간척공사 등 기타 노역에 강제 동원되어 시달리고 있었다. 3 · 1운동에 참여한 대부분의 민중들은 농민들로서 염업(鹽業)을 부업으로 하고 있었다.
일제의 경제적 침략으로 더욱 큰 피해를 입게 된 민중들은 염세(鹽稅) 납부를 거부하면서 적극적인 염세저항운동을 벌였다. 그들은 누구보다도 일제에 대한 피해의식과 강한 반일 감정을 지니고 있었고, 이러한 상황은 천도교의 조직력과 함께 수원 지역의 3 · 1운동이 격렬하게 전개되는 하나의 배경이 되었다.
4월 3일에는 민중들이 장안면 화수리에 있던 경찰관 주재소로 몰려가 일제히 독립만세를 부르면서 투석하였고, 이때 놀라 도망치는 순사 가와바타 도요타로[川端豊太郞]가 쏜 총에 천도교인 3명이 희생되었다.
가와바타는 곧 민중들에게 포위되어 이봉구(李鳳九), 차희식(車喜植), 장소진(張韶鎭) 등에 의해 처단되었다. 이에 일제는 3 · 1운동의 주동자 체포와 수색을 빙자하여 살인, 방화, 구타를 일삼았다. 4월 2일부터 14일까지 8개 면 29개 마을에서 소실된 가옥이 348호, 사망자가 46명, 부상자가 26명, 검거 인원이 442명에 이른다.
일제의 폭력적 대응과 탄압이 극에 달한 것이 4월 15일 제암리 학살이다. 4월 13일 육군 보병 79연대 소속의 일본군 중위 아리타 도시오[有田俊夫]는 보병 13명을 이끌고 발안에 내습하였다. 발안 내 다른 지역의 시위 주도자들은 2차에 걸친 검거 작전으로 대부분 체포되었는데, 발안 시위를 주도하였던 제암리 주도자들을 체포하지 못하자 아리타는 제암리 진압을 시작하였다.
4월 15일 아리타는 부하 11명과 순사 1명, 순사보 조희창(趙熙彰)과 사사카[佐坂] 등의 안내를 받으며 제암리로 넘어왔다. 그리고 3 · 1운동의 주동자였던 천도교와 기독교도들을 제암리 교회에 몰아넣고 30여 명을 살상하였다. 이때 안유순(安有淳)도 아버지 안봉순과 함께 현장에서 순국하였다.
일제는 마을 대부분을 소각하는 악행을 저질렀고, 이때 장안면 수천리에도 난입하여 방화 · 살상을 하였으며, 천도교회당과 기독교회당도 함께 불에 타 없어졌다.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