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명 봉래(鳳來). 경기도 화성시 우정읍 출신. 1919년 4월 3일 주곡리 광장에 갔다가, 차희식(車喜植)으로부터 만세시위운동 계획을 전해듣고 적극 참여하기로 하였다.
이 날 독립만세운동을 계획하였던 차희식 등은 이미 다른 동네 사람들에게도 모두 몽둥이를 가지고 장안면사무소로 모일 것을 연락하고, 면장 김현묵(金賢默)에게도 동참할 것을 권유, 승낙을 받았다.
연락을 받고 석포리에 살고 있던 이영쇠(李永釗)에게 이 계획을 전하고, 즉시 장안면사무소로 달려갔다. 당시 면사무소에서는 면장이 200여명의 군중 앞에서 독립만세운동에 대한 취지를 역설하고 있었다. 장소진은 군중의 선두에 서서 투석과 몽둥이로 면사무소를 부수고 공문서를 파기하였다.
점차 군중이 1,000여 명으로 늘어나자 이들을 인근의 쌍봉산으로 인솔하여 그곳에서 독립만세를 외치게 하였다. 이어서 차인범(車仁範) 등과 2,000여명으로 불어난 군중을 인솔하여 우정면사무소로 달려가 건물과 집기, 공문서를 부수었다.
다시 군중을 인솔하여 같은 면내인 화수리에 있던 경찰관 주재소를 습격하여 투석, 소각하였다. 이때 주재소 안에서 일본인 순사 가와바타[川端豊太郎]가 총을 쏘며 도망치자, 차희식·차인범·이순모(李順模)·장제덕(張濟德) 등과 추격하여 격살하는 등 격렬하게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결국 체포되어 12년형을 선고받고 서대문감옥에서 복역중 병보석으로 풀려났으나, 모진 고문의 여독으로 사망하였다.
1968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