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용인 출신으로, 본관은 순흥(順興)이다. 1888년 9월 25일 출생하였고, 1919년 3월 29일 시위 도중 일제의 총격으로 사망하였다.
용인 지역의 3 · 1운동은 다른 지역과 마찬가지로 초기에는 평화적인 시위가 전개되다가 일본 헌병의 무자비한 탄압과 발포로 점차 폭력화하는 과정을 거쳤다.
용인 지역은 수여면, 모현면, 기흥면, 수지면, 읍삼면, 외사면, 이동면, 고삼면, 원삼면, 남사면, 포곡면 등 각 면 단위로 3 · 1운동이 전개되었다.
1919년 3월 21일 원삼면 좌전고개에서는 1,000여 명이 결집하여 조선인의 독립의지를 널리 알렸고, 3월 28일 수여면에서는 유방리 500여 명의 농민들이 격렬한 시위를 벌였다. 한편, 읍삼면과 수지면이 연합한 3 · 1운동도 기획되었다. 용인 지역 천도교인들의 주도로 기독교인과 연합한 시위 계획을 조직화함으로써 지역간, 종교간의 연대적 특성을 드러내기도 하였다.
3월 28일 수지면 고기리(古基里) 이장 이덕균(李德均)은 읍삼면 마북리에 사는 안종각(安鍾珏)으로부터 조선 독립 시위운동을 권유받자, 동네 사환을 시켜 “각 집에서 1명씩 나와 동천리 방면으로 가서 대한독립만세를 부르자.”라는 말을 전달하였다.
이튿날인 29일 오전 9시 고기리 주민 100여 명을 규합하고, 안종각에게서 받은 태극기를 휘두르며 선두에 서서 독립만세를 연달아 부르면서 동천리까지 행진하였다. 이때 동천리 주민 200여 명이 합세하였다.
고기리와 동천리의 연합 시위대는 풍덕리를 거쳐 수지면사무소 앞에서 독립만세를 고창하였다. 그리고 수지면사무소 광장에 모인 면민 600명과 함께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연좌시위(連坐示威)를 벌이면서 읍삼면 마북리로 향하였다.
그러나 일본 헌병의 발포로 안종각과 최우돌(崔又乭)이 피살되었고, 검거된 16명은 경성지방법원으로 이송되어 태형 90대에 처해졌다. 고기리 이장 이덕균은 징역 1년 6월을 선고받았다.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