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순서는 일제강점기, 경기도 안성군 원곡면 · 양성면에서 일어난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한 독립운동가이다. 1919년 4월 1일 원곡면 · 양성면 주민이 연합한 독립만세시위를 이끌었다. 시위 군중이 2,000여 명으로 늘어나자 김순서는 앞장서서 원곡면사무소, 순사주재소 등의 문서와 물품 등을 불태우고 양성우편소의 전화선을 절단하는 등 일제 식민기관에 직접적인 무력을 행사하였다. 일본 군경에 체포되어 징역 10년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르던 중 옥중에서 순국하였다.
1896년 4월 19일 경기도 안성군 원곡면 외가천리에서 태어났다. 고향에서 농업에 종사하던 중 3 · 1운동 소식을 들었다.
안성3·1운동은 3월 11일 양성공립보통학교에서 첫 신호탄을 올렸다. 3월 25일경 내가천리 이시연(李時連) 집에 모여 주도 세력은 인근 마을과 칠곡리 등지에 연락한 후, 3월 28일 면사무소 앞에서 만세를 부르기로 결정하였다.
3월 29일부터 3월 31일까지 만세시위는 계속 전개되었다. 4월 1일 저녁 8시경 등불이나 횃불을 들고 원곡면사무소에 집결한 인원은 1,000여 명에 달하였다. 시위 군중은 원곡면과 양성면 경계인 성은고개에서 나뭇가지로 몽둥이를 만들거나 작은 돌을 주어 양성면 동향리로 나아갔다. 양성면민과 연합한 시위 군중은 2,000여 명으로 늘어났다.
김순서는 시위대를 이끌고 원곡면사무소와 순사주재소의 공문서와 물품 등을 불태우는 한편, 양성면우편소 등을 파괴하고 전화선을 절단하였다. 이어 일본인 잡화상 집과 일본인 대금업자 집을 습격하여 가옥을 파괴하고 가구류 등을 불태웠다. 원곡면사무소를 습격하여 소각하고 아침을 먹은 후, 평택의 경부선 철도를 파괴하려 하였으나 일본수비대가 들어온다는 소식을 듣고 모두 피신하였다.
헌병 장교를 지휘관으로 한 검거반은 현지에서 주로 야간에 검거를 실시하여 약 800명을 검거하였다. 이 와중에 19명의 사상자가 발생하였으며, 17개 마을에서 총 276호의 가옥을 방화하는 만행을 저질렸다. 일본 군경에 체포되어 징역 10년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르던 중 1921년 1월 21일 옥중에서 순국하였다.
2014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