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낙서는 일제강점기, 서울 시내에서 일어난 만세운동에 참가한 독립운동가이다. 서울에서 태어났으며, 3 · 1운동 당시 시민들의 적극적인 참여에 크게 자극을 받았다. 만세운동 열기는 지방으로 확산되는 가운데 서울은 3월 하순에 소강상태로 접어들었다. 3월 27일 야간을 이용하여 만세운동에 참가한 후, 미행하던 일본 경찰에 의해 사망하였다. 구낙서의 참혹한 죽음은 선교사에 의해 알려져 일제의 야만적이고 잔인한 폭력성을 국제사회에 알리게 된 사건이 되었다.
1898년경 서울 계동에서 태어나서 성장하였다. 다른 이름은 구락서(具樂書)이다.
서울의 3 · 1운동은 폭발적으로 전개되었다. 그러나 3월 5일 이후 학생들이 주도하는 만세운동 열기는 점차 사그라지는 분위기였다. 이와 달리 만세시위는 지방으로 확산되는 가운데 노동자와 시민에 의한 독립을 향한 외침은 중단되지 않았다.
구낙서는 1919년 3월 27일 오후 9시경 서울에서 전개된 독립만세시위에 이웃 청년들과 참가하였다. 시위 군중은 시내 재동파출소를 습격한 후, 다시 거리로 나와 독립만세를 고창하였다. 일본 경찰은 기마대를 동원하여 무자비하게 대응하였다.
시위대를 뒤로 하고 구낙서는 자택으로 귀가하다가 뒤를 미행하던 일본 경찰에게 골목에서 기습당해 예리한 칼로 난자당했다. 이로 인해 두개골은 깨지고 뇌장(腦漿)이 분출되는 중상을 입고 길거리에 버려졌다. 지나가던 청년들이 우연히 발견하여 들것에 실어 남대문 밖 세브란스병원으로 이송하려 하였으나, 경찰의 저지로 인해 뒤늦어져 세브란스병원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사망한 상태였다.
청년들은 수소문하여 다음날 기독교계 여학교에 다니는 사촌 여동생에게 이 소식을 알렸다. 병원을 찾은 여동생은 병원에 근무하던 선교사에게 이러한 사실을 알렸고, 선교사는 보고서를 통하여 이 사건을 외국에 알렸다.
사건의 기사는 미국 상원에 배포된 한국사정보고서에 실렸다. 영국대사관 배속(配屬) 무관이 본국에 보고한 내용에도 기록될 정도였다. 구낙서의 참담한 죽음은 일제의 야만적이고 잔인한 폭력성을 국제사회에 알리게 된 사건이 되었다.
1996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