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연방은 일제강점기, 경기도 수원군 우정면에서 일어난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한 독립운동가이다. 경기도 화성군 우정면 화수리에서 태어나 관직 생활을 하다가 을사늑약 이후 낙향하여 고향 지사들과 국채보상운동과 사립학교설립운동에 참여하였다. 우정면 일대에서 일어난 만세운동을 후원하는 등 지역사회 명망가로 활동하였다. 1919년 4월 13일 발안에 도착한 일본군에 의해 집에서 살해되었다.
화성군 우정면과 장안면 주민들은 단순한 만세시위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면사무소를 점거하였으며, 4월 11일 화수리주재소를 습격하였다. 시위대는 주재소를 방화하고 가와바다[川端] 순사를 처단하였다.
직접 시위에는 참가하지 않았지만 김연방은 주변 인사들과 교류하면서 3 · 1운동을 통해 독립을 쟁취할 수 있는 방도를 모색하였다. 이 때문에 일제는 김연방을 눈엣가시처럼 생각하였고 언젠가는 제거해야 할 첫 번째 대상으로 여기고 있었다.
발안 장날에 약 1,000명의 시위대가 태극기를 들고 만세를 부르면서 일본인소학교를 방화하였다. 4월 1일부터 발안장 주위의 산상에서 봉화를 놓으며 일본인이 물러갈 것을 요구하였다. 시위가 확산되면서 식민기관과 관공서에 대한 피해가 격증하자, 일제는 이에 대한 근본적인 처방으로 특별검거반을 만들어 진압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4월 2일부터 14일 사이에 64개 마을에 대한 시위자 검거를 단행하여 약 800명을 검거하고, 검거과정에서 사상자 19명이 발생하였으며, 17개소에서 276호를 방화하였다.
아리타 도시오[有田俊夫]는 수원군 발안장의 수비를 명령받고 4월 13일 발안에 도착하였다. 당시 시위운동 여진으로 인심이 흉흉하였을 뿐만 아니라, 온갖 유언비어가 떠돌고 있었다. 아리타 중위가 이끄는 일본군은 김연방의 집을 포위하고 일방적으로 총격을 가하여 김연방을 사망에 이르게 하였다.
2015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