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용 요약
정의
일제강점기 대구사범학교 학생의 항일 비밀결사인 윤독회와 문예부 및 다혁당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
가계 및 인적 사항
주요 활동
1939년 11월에는 박효준(朴孝濬) · 강두안(姜斗安) · 이태길(李泰吉) · 문홍의(文洪義) 등과 함께 윤독회(輪讀會)를 조직하고 학생들의 민족의식을 담은 원고를 모아 작품집을 간행하기로 결정하고, 1940년 1월 문예지 『반딧불』을 발간하였다.
1940년 11월에는 비밀결사인 문예부를 조직하고 활동에 참가하였는데, 학교 당국과 일제 경찰의 감시와 통제를 피하기 위해 표면적으로는 문예 활동을 표방하고 있었으나, 실제로는 향후 독립운동의 전개를 목표로 하고 있었다.
1941년 2월에는 유흥수의 하숙집에서 권쾌복(權快福) · 배학보((裵鶴甫) · 조강제(趙崗濟) · 최영백(崔榮百) · 문홍의 등과 함께 다혁당(茶革黨)을 조직하고 이에 참여하였다. 당은 산하에 총무부 · 학술부 · 문예부 · 연구부 · 경기부 등의 부서를 두고 각 분야에서 학생들의 독립운동 역량을 강화하고 때가 오면 독립운동에 참여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었다. 당의 명칭인 다혁당은 영웅은 다색(茶色)을 좋아하며, 혁(革)은 혁명을 의미한다는 취지에서 붙여진 것이었다고 한다. 또한, 당(黨)이 결성된 것은 대구사범학교 내의 비밀결사를 통합하여 독립운동의 역량을 강화하고자 하였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1941년 7월 학교를 졸업하고 충청남도 홍성(洪城)에서 훈도(訓導)로 활동하던 정현(鄭鉉)이 수업 중에 학생들에게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내용을 가르쳤던 것이 문제가 되어 일제 경찰에 의해 그의 집이 수색당하던 중, 윤독회(輪讀會)가 발간한 잡지 『반딧불』이 발견되고 당의 존재가 드러나게 되면서 사건이 확대되는 과정에서 체포되었다.
그해 11월까지 학부형 · 교사 등을 포함해 300여 명의 관련자가 검거되었으며, 이 가운데 34명이 재판에 회부되었다. 약 30여 명의 학생이 징역 5년에서 2년 6월의 형량을 선고받았으며, 박재민 · 강두안 · 박찬웅 · 정세파 · 서진구 등은 고문 후유증과 극심한 영양실조로 옥사하였다. 유흥수는 1943년 11월에 대전지방법원에서 징역 5년 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르던 중 8 · 15광복으로 출옥하였다. 광복 후에는 광복회 사무총장과 독립기념관 이사를 지냈다.
상훈과 추모
참고문헌
단행본
- 『독립유공자 증언자료집(유흥수)』 Ⅱ(국가보훈처, 2002)
- 『대구사범학생독립운동』(대구사범학생운동동지회, 1993)
- 『독립유공자공훈록』 6(국가보훈처, 1988)
- 『독립운동사자료집』 13(국가보훈처, 1986)
논문
- 허종, 「일제하 전시체제기 대구지역 학생운동의 전개와 성격– 항일비밀결사를 중심으로」(『대구사학』 110, 대구사학회, 2013)
- 허종, 「일제강점기 후반 대구사범학교의 학생운동」(『한국독립운동사연구』, 2006)
판결문
- 「예심종결결정」(대전지방법원, 1943. 2. 8.)
주석
-
주1
: 일제 강점기에, 초등학교의 교원(敎員)을 이르던 말. 우리말샘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으로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 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사실과 다른 내용, 주관적 서술 문제 등이 제기된 경우 사실 확인 및 보완 등을 위해 해당 항목 서비스가 임시 중단될 수 있습니다.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공공저작물로서 공공누리 제도에 따라 이용 가능합니다.
- 백과사전 내용 중 글을 인용하고자 할 때는 '[출처 : 항목명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과 같이 출처 표기를 하여야 합니다.
- 미디어 자료는 자유 이용 가능한 자료에 개별적으로 공공누리 표시를 부착하고 있으므로 이를 확인하신 후 이용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