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상 책과 함께 하고 있는 선비가 머무르는 곳이라 해서 사랑채를 서재나 서실(書室), 또는 책실(冊室)·책방(冊房)이라 하거나 관아의 시설 중 내아(內衙)에 있는 공부방을 그렇게 부르기도 하며, 향교나 서원에서 스승이 있는 곳을 서재라 부르기도 한다.
서재로 쓰기 위하여 사랑채와 별도로 건물을 마련하기도 한다. 창덕궁(昌德宮) 연경당(演慶堂)의 선향재(善香齋)가 그런 유형에 속하는 유구(遺構)이다. 선향재는 맞배지붕의 단층건물인데 좌우합각 아래에 전돌로 온담을 쌓은 것이 다른 건물과 다르다. 빗물이 스며드는 일을 방지하는 시설이다.
이런 유형으로는 경복궁(景福宮) 향원정(香遠亭)의 신무문(神武門) 동편에 있는 고종이 지은 집옥재(集玉齋)가 있다. 역시 서재로 사용할 목적에서 조영된 것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창덕궁의 후원 쪽에 있는 주합루(宙合樓)는 다락집의 형상인데, 아래층은 서고를 마련하고 왕실도서를 수장하던 규장각(奎章閣)이고, 다락은 열람실로 쓰던 것이라 한다.
서고를 설치하였던 누하(樓下)는 다른 다락집과 달리 천장은 소란반자를 하고, 기둥 칸살에는 문짝을 달았고, 바닥에는 구들시설을 하였다. 습기가 차면 언제나 불을 지펴 제습할 수 있도록 준비된 시설이라고 할 수 있다. 국가의 사료(史料)들을 보관하는 사고(史庫)의 서고는 사각(史閣)이라 하며 다락집 형태이다.
궤짝에 보장(保藏)한 서책과 문서를 다락 위에 보관하도록 배려하였는데 이는 습기를 피하기 위함이다. 탁지부(度支部)에 속한 판적사(版籍司)의 판적고(版籍庫)도 다락집 형태이었다. 이는 서고의 보편적인 형상이 되었던 것으로 여겨지는데 일본에 남아 있는 쇼소원(正倉院)도 귀틀로 지은 다락집 유형이다.
서책과 귀중한 문서와 보물들이 보관되는 곳간인데 이런 모습의 창고를 고구려에서는 부경(桴京)이라 하였고, 그런 부경의 모습이 고구려의 강토이었던 지금의 중국 마선구(麻線溝)의 고분에서 출토된 벽화에 그려져 있다.
서고만으로 쓰였던 것은 아니지만 귀중한 물화(物貨)들을 보장하기 위한 시설로 서책과 문서도 함께 수장되어 있다는 점에서 서고의 시발이 거기에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이 제도는 조선시대에도 계속되어 집옥재에는 부설서고가 다락집으로 구조되어 있다. 또, 향교나 서원의 판장고(版藏庫)나 장판각(藏版閣)도 역시 다락집형이다.
이런 장판각에는 서책을 인쇄하는 판본과 함께 간행된 책이나 수집된 책과 서화류 등이 보관되기도 한다. 주합루는 아래층을 서고, 위층을 열람실로 하였을 뿐만 아니라 주변에 있는 서향각(書香閣 : 후대에는 용도 변경됨.)이나 희우정(喜雨亭)·제월광풍관(霽月光風觀) 등을 만들었다.
또는 언덕 너머 애련정이 있는 애련지반(愛蓮池畔)의 기오헌(奇傲軒)과 기두각(倚斗閣)과 같은 열람실로 따로 만들어서 사용하기도 하였다. 이는 익종이 아직 임금자리에 나가기 전인 1827년에 경영한 독서당(讀書堂)이다. 보편적으로 선비의 서재는 선향각과 방불한 유형으로서 서고와 열람실이 함께 있는 건물이다.
한쪽에 정자라도 있으면 독서실로 이용되었다. 서재를 따로 지을 형편이 못 된 선비들은 자기가 기거하는 사랑채를 서재로 삼았다. 뒷방이나 골방에 책을 가득하게 쌓아두고 필요에 따라 꺼내다 보고는 하였다.
사랑채조차 지닐 수 없는 가난한 선비는 사랑방의 한쪽에 벽장이나 다락을 만들고 귀한 서책을 거기에 보관해 두고는 늘 꺼내보는 일로 만족하였다. 이들에게는 뒷동산의 시원한 그늘 아래의 바위가 훌륭한 독서실이 되기도 하고 더러는 명산대찰을 찾아가 독서하는 일에 열중하기도 하였다.
책을 늘 가까이 하고 있는 선비들은 자기가 거처하는 서재에 아취가 넘치는 당호를 지어 편액을 만들어 걸어두기도 하는데 무슨무슨 서실이니 서재니 혹은 재니 헌이니 당이니 하거나 정사(精舍)라는 어휘를 곁들여 작호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