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에 목활자 인쇄가 보편화되기 이전에는 민간의 경우, 목판 인쇄가 일반적으로 이루어졌다. 활자 인쇄와 달리 목판 인쇄는 목판 제작 이후 책판이 고스란히 남는다. 조선시대 사람들은 조상의 글이 새겨진 책판을 조상의 정신이자 유산으로 인식하였으므로 책판을 인쇄한 이후 책판의 관리와 보존에 심혈을 기울였다. 이렇게 목판본을 인출한 이후에는 상당히 많은 양의 책판을 보관할 수 있는 공간이 필요하였다. 이에 따라 서원 · 향교 · 서당 · 사가 · 사찰에서는 책판을 보관하기 위한 별도의 건물을 지었는데, 이를 장판각(藏板閣)이라 한다. 조선시대의 서원에서는 재사(齋祠) 등에 장판각을 지어 책판을 보존하였고, 사가(私家)에서는 문중 소유의 토지에 장판각을 지어 보관하거나 문중 관련 사찰에 장판각을 만들어 위탁 보관하기도 하였다.
서원 장판각의 대표적인 사례로는 도산서원, 돈암서원, 병산서원 등이 있다. 도산서원 장판각에는 퇴계 이황(李滉)의 문집, 유묵, 언행록 및 저술류와 선조 어필 등 3천여 장의 책판이 소장되어 있었다. 돈암서원 장판각에 소장했던 책판과 관련해서는 『돈암서원지(遯巖書院誌)』 「장판각기(藏板閣記)」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이에 따르면 1634년에 장판각을 건립한 이후 그동안 서원에서 보관해 오던 구판(舊版)과 사계 김장생(金長生)의 유고(遺稿) 및 저술류 책판을 모두 합쳐 4천장 정도의 책판을 소장하였던 것으로 확인된다.
단성(丹城) 상산김씨(商山金氏) 문중에서는 1890년경에 허전(許傳)의 문집인 『성재집(性齋集)』을 목판본으로 간행하였다. 당시 판각한 『성재집』의 책판 수는 총 632장이었다. 상산김씨 문중에서는 문집 인쇄가 끝나가자 책판을 보관하기 위해 단성 법물리에 장판각 4칸를 건립하였다. 당시 『성재집』 간행 과정에서 소요되었던 지출 내역을 상세히 기록한 장부가 남아있는데, 책판 보관과 활용을 위한 장판각 건립 비용이 전체 간행 비용의 약 17% 정도를 차지할 정도로 장판각 건립은 책판 제작과 더불어 간행 사업에서 중요한 비중을 차지했던 것으로 확인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