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각본은 활자본 또는 목판본을 저본으로 삼아 목판에 다시 새기고 인출한 서책이다. 조선시대에는 중앙의 주자소 또는 교서관에서 인쇄한 금속활자본이 지방 감영으로 보내져 목판본으로 번각되었던 사례가 많았다. 당시 지방 감영에서는 중앙에서 보낸 금속활자본을 저본으로 다시 나무판에 새겨 번각본을 만들었다. 지방에서 번각본이 제작되면 금속활자본에 비해 대량 인쇄가 가능하여 많은 부수를 널리 배포할 수 있었고, 책판을 오랜 시간 보관하여 지속적으로 인출하는 이점이 있었다.
번각(飜刻)은 활자본 또는 목판본 등의 인본을 저본으로, 인본의 낱장을 목판에 뒤집어 새겨내는 출판 방식이다. 조선시대에는 중앙 활자 인쇄의 공급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지방 관아에서 빈번하게 번각본을 제작하였다. 중앙의 주자소 또는 교서관에서 사용하였던 활자 인쇄는 조판에 따른 판의 흔들림으로 인해 대량의 부수를 인쇄할 수 없었다. 그래서 중앙의 활자본을 각 지방의 감영 등으로 보내 이를 저본으로 신속하게 번각본 제작을 할 수 있는 시스템을 갖추고 있었다. 지방에서 번각한 목판 인쇄의 경우에는 하나의 판이 일체형으로 제작되었기 때문에 대량 인쇄가 가능하였고, 책판을 지방 관아에 오랜 기간 보관하여 수요가 있을 때마다 수시로 인출할 수 있었다. 즉 중앙의 활자 인쇄로는 배포 수량의 한계를 보였는데, 이를 보완하기 위해 지방의 목판 번각 인쇄를 활용하였던 것이다. 그 대표적인 사례로는 1777년 경상감영에서 번각한 『명의록(明義錄)』과 1778년 전라감영에서 번각한 『속명의록(續明義錄)』 등이 있다. 이처럼 신속한 대량 인쇄와 서적의 광범위한 배포를 목적으로 지방에서 번각본이 제작되었다.
원본인 활자본 또는 목판본을 더 이상 구하기 어려운 경우에는 원본을 목판에 붙여 새겨 번각본을 만들었다. 그 대표적인 사례로는 고려시대 주자본을 번각한 『남명천화상송증도가(南明泉和尙頌證道歌)』를 들 수 있다. 번각본에 수록된 1239년 진양공 최이의 발문에 의하면 "증도가의 전래가 끊겨 유통되지 않기에 공인을 모집하고 주자본을 거듭 새겨 오래 전래될 수 있도록 한다."라고 하였고, 이때 거듭 새긴다는 표현으로 '중조(重彫)'라는 표현을 사용하였다. 더 이상 구하기 어려운 희귀본의 경우에는 원본을 뜯어 목판에 다시 새기는 번각 방식을 사용함으로써 원본을 대량 인쇄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번각본의 제작 과정은 다음과 같다. 첫째, 활자본이나 목판본으로 찍은 인본을 해체하여 낱장으로 분리한다. 분리된 낱장을 목판에 풀칠하여 뒤집어 붙이고 젖은 천으로 문질러 종이를 목판에 완전히 밀착시킨다. 둘째, 종이가 마른 이후에 글씨가 선명하게 보일 수 있도록 기름을 바르고, 글자 획이 탈락되지 않도록 정교하게 판각한다. 셋째, 판각이 끝나면 손잡이를 붙인다. 이후 목판의 글자면에 부드러운 솔로 먹을 고루 바르고 종이를 올려 밀대로 밀어준다. 넷째, 원본과 번각 인출본을 대조하여 교정 작업을 진행하고 완성된 인출본을 오침 안정법으로 묶어 장정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