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각(模刻)은 종이에 쓰여진 글씨나 그림을 보존하기 위해 돌이나 나무에 원본을 정교하게 모사하여 이것을 정이나 끌로 새긴 것이다. 모각을 할 때 글씨나 그림은 거울 방식처럼 좌우 반전을 하지 않고 원본 그대로의 방향으로 모사하여 새긴다. 모각은 종이 매체를 돌이나 나무 매체로 변환하여 보존과 감상을 위한 목적으로 제작한 것이다. 다만 새겨진 돌이나 나무 그 자체를 사용하는 경우는 없고 이를 탁인하여 탁본(拓本)으로 만들어 사용하였다. 서예 작품 가운데 원래 비석에 새겨진 글씨가 아닌데도 탁본이 되어 있는 경우들이 바로 모각 방법에 의해 탁본으로 제작된 것이다. 이와 같이 보존 · 감상 · 학습용으로 모사하고 새겨 탁인한 서첩을 법첩(法帖)이라고 한다.
중국에서 발명된 종이가 일반적인 기록 매체로 사용되게 된 것은 위진남북조(魏晋南北朝) 시대 무렵이다. 이 시기 서성(書聖)이라 불리며 행서와 해서를 완성시킨 이는 동진(東晋)의 왕희지(王羲之) · 왕헌지(王献之) 부자이다. 당시 이들의 글씨를 배우려는 서가(書家)들이 많아져, 왕 부자의 글씨를 복제한 법첩의 수요가 많아졌다. 왕 부자의 글씨를 종이에 베끼기 위한 방법으로는 쌍구전묵(雙鉤塡墨)에 의한 모사(模寫) 방법이 있었다. 그러나 모사 기술을 가진 사람이 한정되어 있었고 다량의 복제가 가능한 효율적인 방법을 찾게 됨에 따라 모각에 의한 법첩 제작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모각이 본격적으로 이루어진 것은 당대(唐代) 후기로 알려져 있다. 5대10국의 남당(南唐) 시대에 모각을 이용해 『승원첩(昇元帖)』이나 『징청당첩(澄清堂帖)』 등의 집첩(集帖)이 만들어졌다. 이 방식은 북송(北宋)에도 계승되었는데, 북송대는 옛 책의 연구나 수집 · 감정이 이루어지며 글씨에 대해 학문적 접근이 행해진 시기이다. 송조의 태조(太祖)와 태종(太宗)은 책의 연구와 수집을 애호하여 992년(순화 3년)에는 한림(翰林) 시서학사(侍書學士)인 왕저(王著)가 칙명을 받아 왕희지를 중심으로 한 고금의 명적을 모아 『순화각첩(淳化閣帖)』 10권을 편찬하였다. 『순화각첩』은 모각법을 사용해 제작한 것이이다. 돌이나 나무에 모각을 하면 보존성이 뛰어나고 다량의 탁본 복제본을 만들 수 있었기 때문에 모각에 의한 탁본은 모사를 대신하여 새로운 방식의 복제본 제작법으로 자리잡았다. 이후 모각은 역대 서예 명적을 모사하여 법첩으로 제작하기 위해서 필수적으로 사용될 정도로 보편화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