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비

동문선(권52) / 화왕계
동문선(권52) / 화왕계
사회구조
개념
학식과 인품을 갖춘 사람에 대한 호칭으로, 특히 유교이념을 구현하는 인격체 또는 신분계층을 가리키는 유교용어.
•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거쳐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내용 요약

선비는 학식과 인품을 갖춘 사람에 대한 호칭으로, 특히 유교이념을 구현하는 인격체 또는 신분계층을 가리키는 유교용어이다. 한자어 사(士)와 같은 뜻으로 쓰인다. 선비는 학업을 통해 자신의 인격을 수양하고 학문을 연마하며, 벼슬살이를 통해 자신의 뜻을 펴고 신념을 실현했다. 유교를 국시로 삼은 조선시대에 들어와 도학의 이념을 담당하는 사회의 지도 계층으로서 지위가 확립되었다. 더불어 유교적 도덕규범들을 모범적으로 실천하여 대중들을 교화하는 사회적 책임도 졌다. 오늘날은 사회가 요구하는 이념적 지도자 내지 지성인의 의미로 이해할 수 있다.

정의
학식과 인품을 갖춘 사람에 대한 호칭으로, 특히 유교이념을 구현하는 인격체 또는 신분계층을 가리키는 유교용어.
선비의 어원

선비는 한자어의 사(士)와 같은 뜻을 갖는다. 어원적으로 보면 우리 말에서 선비는 ‘어질고 지식이 있는 사람’을 뜻하는 ‘선ᄇᆡ’라는 말에서 왔다고 한다.

‘선ᄇᆡ’의 ‘선’은 몽골어의 ‘어질다’는 말인 ‘sait’의 변형인 ‘sain’과 연관되고, ‘ᄇᆡ’는 몽고어 및 만주어에서 ‘지식이 있는 사람’을 뜻하는 ‘박시’의 변형인 ‘ᄇᆞ이’에서 온 말이라고 분석되기도 한다.

이에 비하여 한자의 사(士)는 ‘벼슬한다’는 뜻인 사(仕)와 관련된 말로서, 일정한 지식과 기능을 갖고서 어떤 직분을 맡고 있다는 의미를 갖는다. 『설문해자(說文解字)』에서는 사(士)의 글자 뜻을 ‘일한다’ 또는 ‘섬긴다’(士, 事也)’는 뜻으로 보아, 낮은 지위에서 일을 맡는 기능적 성격을 지적하였다.

동시에 ‘士’는 ‘十’(수의 끝)과 ‘一’(수의 시작)의 결합으로 된 회의문자(會意文字)로 보고 있다. 곧 ‘十’을 미루어 ‘一’에 합한다고 풀이하면 넓은 데에서 간략한 데로 돌아오는 박문약례(博文約禮)의 교육방법과 통하고, ‘一’을 미루어 ‘十’에 합한다고 풀이하면 하나의 도리를 꿰뚫는다(吾道一以貫之)는 뜻과 통하는 것으로 해석된다.

이런 의미에서 ‘사(士)’는 지식과 인격을 갖춘 인간으로 이해될 수 있고, 그만큼 우리말의 선비와 뜻이 통한다.

중국에서 ‘사’는 은대(殷代)에도 관직명칭으로 나타나지만 주대(周代)에서는 봉건계급 속의 한 신분계급으로 드러났다. 곧 왕(천자) · 제후 · 대부 · 사 · 서인의 5등 봉건신분계급에서 ‘사’는 ‘대부’보다 낮고 ‘서인’보다 높은 신분이며, 관류의 직분으로서는 가장 하위에 속하는 계급이다.

또한 ‘사’는 특히 학업과 관련시켜 언급되는 사실을 볼 수 있다. 『예기(禮記)』에는 ‘오사제도(五士制度)’가 보인다. 마을에서 학업에 뛰어난 ‘수사(秀士)’를 가려서 사도(司徒)에게 추천하면 ‘선사(選士)’가 되고, 사도가 선사 가운데서 뛰어난 자를 국학(國學)에 추천하면 ‘준사(俊士)’가 되며, 선사와 준사 가운데서 학문이 성취된 자를 ‘조사(造士)’라 하고, 대악정(大樂正)이 조사 가운데 뛰어난 자를 왕에게 보고하고 사마(司馬)에게 추천하면 ‘진사(進士)’가 되며, 사마가 진사 가운데 현명한 자를 가려서 관직에 임명하는 것이다.

‘사’의 성격은 춘추전국시대에 공자와 맹자를 중심으로 유교사상이 정립되는 과정에서 관직과 분리되어 인격의 측면이 뚜렷하게 확인되었던 것이라 할 수 있다.

공자와 그의 제자들은 자신을 ‘사’의 집단으로 자각하였다. 그들은 관직을 목적으로 추구한 것이 아니라 도(道)를 실행하기 위한 수단으로 보았기 때문에, 유교이념을 실현하는 인격을 선비로 확립하였다.

공자는 도에 뜻을 두어 거친 옷이나 음식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인격을 선비의 모습으로 강조하였다. 제자인 자공(子貢)에게 “자신의 행동에 염치가 있으며 외국에 사신으로 나가서 임금의 명령을 욕되게 하지 않으면 선비라 할 수 있다.”라고 말하였다.

그러면서 당시 정치에 종사하는 사람을 가리켜 “좀스러운 인물들이니 헤아려 무엇하랴.”라고 비평하였던 것도 선비는 관직이나 신분계급을 넘어서서 인격적인 덕성을 갖춘 존재임을 지적하는 것이다.

선비의 인격적 조건은 생명에 대한 욕망도 초월할 만큼 궁극적인 것으로 제시된다. 공자는 “뜻 있는 선비와 어진 사람은 살기 위하여 어진 덕을 해치지 않고 목숨을 버려서라도 어진 덕을 이룬다.” 하였다.

증자(曾子) 또한 “선비는 모름지기 마음이 넓고 뜻이 굳세어야 할 것이니, 그 임무는 무겁고 갈 길은 멀기 때문이다. 인(仁)으로써 자기 임무를 삼았으니 어찌 무겁지 않으랴. 죽은 뒤에야 그칠 것이니 또한 멀지 않으랴.”라고 하여 인(仁)의 덕목을 지적하였다.

자장(子張)도 “선비가 위태로움을 당하여서는 생명을 바치고, 이익을 얻게 될 때에는 의로움을 생각한다.”고 하여 의로움의 덕목을 강조하였다. 맹자는 “일정한 생업이 없이도 변하지 않는 마음을 갖는 것은 선비만이 할 수 있다.”고 하여 지조를 선비의 인격적 조건으로 지적하고 있다.

이처럼 ‘사’는 신분계급적 의미를 넘어서 유교적 인격체로 파악되고 있으며, 우리 말의 선비가 지닌 인격적 성격과 일치할 수 있는 것이다. 선비는 유교이념을 담당한 인격이라는 뜻에서 ‘유(儒)’로도 쓰인다.

‘사’는 신분적 의미에서는 바로 윗계급인 대부와 결합하여 사대부(士大夫)라 일컬어진다. 곧, ‘사’와 대부는 신분의 상승과 하강이 가능한 연속적 관계이므로, 통합하여 하나의 계급으로 삼은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사’가 인격적 의미에서는 유교적 인격체인 군자(君子)의 호칭과 결합되어 사군자(士君子)로 일컬어진다.

유교의 인격개념에서도 계층적 단계를 엿볼 수 있다. “사는 현인을 바라고, 현인은 성인을 바라고, 성인은 하늘을 바란다.”는 주돈이(周敦頤)의 말에서도 ‘사’는 현인의 아래 단계로서 군자를 향하여 상승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사’는 사회기능적 의미에서 독서로 학문을 연마하여 관료가 될 수 있는 신분이다. 이런 점에서 ‘사’는 일반의 생산활동인 농업 · 공업 · 상업에 종사하는 사람과 병칭되어, 사 · 농 · 공 · 상의 이른바 사민(四民) 속에서 첫머리에 놓인다.

선비는 백성과 결합하여 사민(士民)으로 일컬어지기도 하고, 서인들과 결합하여 사서인(士庶人)으로 일컬어지는 사실은 선비가 지배계층으로 올라갈 수도 있지만, 대중들과 함께 피지배층을 이루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이런 여러 의미 속에서도 우리 말의 선비개념은 사군자의 인격적 성격을 핵심으로 삼고 있는 것이다.

선비의 역사적 유래

삼국시대 초기부터 유교문화가 점차 폭넓게 받아들여지게 되자, 유교적 인격체인 선비의 덕성에 관한 이해가 성장해갔다.

2세기 말엽 고구려 고국천왕(故國川王) 때, 은둔하여 밭갈이하고 살다가 추천을 받아서 재상의 자리에 올랐던 을파소(乙巴素)라는 인물이 있었다.

그는 재상의 책임을 맡고서 나올 때 말하기를, “때를 만나지 못하면 숨어 살고 때를 만나면 나와서 벼슬하는 것이 선비의 떳떳한 일이다.”라고 하였다. 을파소는 자신의 처지를 선비로 자각하였고 선비의 나아가고 물러서는 도리를 명백하게 제시하고 있다.

이 시대에는 봉건 신분계층으로 ‘사’의 계급이 형성된 것은 아니지만 유교이념의 인격으로 ‘사’의 관념이 인식되었다. 삼국사회가 발전함에 따라 ‘사’의 활동도 점점 뚜렷해진다.

372년(소수림왕 2) 고구려에 태학(太學)이 세워진 것을 시작으로 삼국에 각각 태학 또는 국학이 세워졌다. 태학에서는 유교이념을 교육하여 선비를 양성하였으며, 박사(博士)를 두어 인재를 가르쳤다.

박사제도는 경전에 관한 전문지식인으로서 선비의 활동을 보여준다. 고구려 영양왕태학박사 이문진(李文眞)백제 근초고왕 때 박사 고흥(高興)은 역사를 기록 · 편찬하였으며, 신라진흥왕은 널리 문사(文士)를 찾아서 국사를 편찬하게 하였다. 당시에 역사의 기록과 편찬은 선비들의 임무였음을 알 수 있다.

7세기에 활동하던 신라의 인물인 강수(强首)설총(薛聰)은 선비의 활동모습을 뚜렷하게 보여준다. 강수는 탁월한 한문의 조예와 유교에 대한 신념을 지녔던 인물로서 삼국통일 시기에 외교문서를 다루는 데 크게 기여하였던 당대의 대표적 문장가였다.

그가 비천한 출신의 아내를 맞는 것을 부끄러운 일이라고 나무라는 아버지에게, “가난하고 천한 것이 부끄러운 일이 아니요, 도리를 배우고서도 이를 행하지 않는 것이 참으로 부끄러운 일입니다.”라고 대답하며 의리를 지키는 선비의 태도를 보여주었다.

설총은 이두를 지어 경전을 해설하는 등 유교교육에 기여하였다. 그가 신문왕에게 「화왕계(花王誡)」를 지어서 어진 이를 가까이 하고 여색을 멀리하도록 간언하였던 것도 선비의 태도를 보여준다.

강수는 6두품인 사찬(沙飡)에 임명되었고, 통일신라 말의 입당(入唐) 유학생이었던 최치원(崔致遠)은 귀국하여 6두품인 아찬(阿飡)에 임명되는 사실에서, 성골진골이 아닌 선비가 오를 수 있는 관직은 6두품이었음을 알 수 있다.

고려 때에는 한층 더 교육제도가 정비되어 국자감(國子監)을 비롯하여 지방의 12목에까지 박사(博士)를 두어 인재를 양성하였다. 과거제도가 정립되어 진사과(進士科)와 명경과(明經科)를 통해 선비들이 관직에 나아갈 수 있는 길이 확보되었다.

관직제도에서도 한림원(翰林院) · 학사원(學士院)을 비롯하여 보문각(寶文閣) · 숭문관(崇文館) · 홍문관(弘文館) · 집현전(集賢殿) 등에는 학사(學士) 등 선비들이 맡는 관직이 있어서 문장과 경연(經筵) 강의 등을 담당하였다.

고려시대는 선비들의 공직활동도 뚜렷하게 확대되었고, 교육기관을 통한 선비의 양성도 확장되었다. 국자감을 중심으로 하는 관학이 쇠퇴할 때는 12공도(孔道: 공자가 가르친 道)의 사학이 융성하였던 사실을 볼 수 있다.

고려 말엽 충렬왕안향(安珦)백이정(白頤正) 등에 의하여 원나라로부터 성리학 내지 주자학이 도입되면서 유교이념의 새로운 학풍과 학통이 형성되었다. 여기서 이른바 도학이념이 정립되면서 선비의 자각도 심화되었다.

곧 불교나 노장사상의 풍조를 배척하고 유교 이념을 실현하기 위한 사회개혁의식이 이들 도학이념의 선비들 속에서 성장하였다. 이색(李穡)을 중심으로 정몽주(鄭夢周) · 이숭인(李崇仁), 또는 길재(吉再) 외 고려 말 ‘삼은(三隱)’은 학문이나 의리 등에서 이 시대 선비의 모범으로 존숭되는 인물이었다.

조선 초에 들어와 유교이념을 통치 원리로 삼으면서 선비들은 유교이념의 담당자로서 자기확신을 정립하였다. 조선 초에 선비들은 고려 말 절개를 지킨 인물인 정몽주를 추존(推尊)하였고, 절개를 굽히지 않은 길재의 학통에서 선비의식을 강화시켜갔다.

이들은 조선왕조 건국기의 혁명세력을 중심으로 고위관리로서 문벌을 이룬 훈구세력에 대항해 새로 진출하기 시작한 인물들로서, 절의를 존경하고 숭배하는 입장을 지닌 자신들을 사림파(士林派)로 구분하는 선비의 공동체 의식을 형성하였다.

사림파는 도학의 이념을 철저히 수련하고 실천하며 사회의 개혁의지를 발휘하였다. 이들은 훈구파의 관료세력을 비판하는 입장에 섰고, 훈구파는 사림파를 과격한 이상주의자로 배척하여 억압하는 데서 이른바 사화(士禍)가 일어나 사림파의 선비들이 엄청나게 희생을 치르었다.

조선시대는 유교이념이 지배한 시대인 만큼이나 선비들의 사회적 비중이 압도적이었다. 사화에서 많은 희생자가 나왔지만 마침내 선비들이 정치의 중심세력으로 등장하는 사림정치시대를 이루었다. 조선시대에는 사대부에 의한 관료제도가 정착되었고, 사회의 지도적 계층에서 선비의 위치는 가장 중심적인 것이었다.

선비의 생애와 활동

조선시대에 들어와서 선비들이 사회의 지도적 계층으로서 그 지위가 확립되었을 때에는 선비의 생활양상도 매우 엄격한 규범에 의하여 표준적인 정형화가 이루어지게 되었다.

선비는 관직에 나가면 임금의 바로 아래인 영의정에까지 오를 수 있는 가능성을 갖고 있으며, 혹은 산 속에 은거하더라도 유교의 도를 강론하여 밝히고 수호하여 실천하는 임무를 지니는 중대한 책임을 지고 있는 신분이다. 따라서 이들 선비가 서민대중으로부터 받는 존숭은 지극하며 그만큼 영향력도 컸다.

선비는 도학의 이념을 담당하는 계층이므로 사회의 올바른 방향을 지도하는 지혜를 발휘해야 하며, 의리의 신념을 사회 속에 제시하고 실천해야 하였다. 이와 더불어 유교적 도덕규범들을 실천하는 모범을 보여서 대중들을 교화해야 하는 사회적 책임을 지고 있었다.

따라서, 선비는 집 밖에 나가거나 집 안에 들어오거나 항상 그 사회의 가치를 실현하고 제시하는 주체로서 자신의 임무를 실천해야 하는 지도자로서의 성격을 띠고 있었다.

『소학』에서는 한 인간의 성장과정을 통해 선비의 생애를 보여주고 있다. 이는 『예기』 내칙편(內則篇)을 인용한 고전적인 양식이다. 곧 어린아이가 가정에서 교육을 받으며 성장하다가 10세가 되면 남자아이는 사랑에서 아버지와 자며 선생을 찾아가 배우고, 20세가 되면 관례(冠禮: 아이가 어른이 되는 예식)를 하고 널리 배우며, 30세에는 아내를 맞아 살림을 하며, 40세에는 벼슬에 나가고, 70세에는 벼슬을 사양하고 물러난다는 것이다.

이러한 생애의 과정은 모든 인간의 일생과 비슷하지만, 선비에게서 특징적인 것으로 크게 학업과 벼슬살이의 두 가지를 들 수 있다.

선비는 한평생 학업이 중단되는 일이 없겠지만, 특히 가정에서 받는 교육과 함께 밖으로 스승을 찾아가서 오랜 기간 동안 교육을 받는 사실은 선비가 타고난 신분으로서 성립되는 것이 아니라 학문과 수련으로 형성되는 것임을 말해준다. 이런 의미에서 선비는 독서인(讀書人)이요 학자로 이해되기도 하였다.

선비가 배우는 학문의 범위는 정해진 것이 아니지만, 그 근본은 인간의 일상생활 속에서 부딪치는 일의 마땅한 도리를 확인하고 실천하였다. 유교의 학문은 일상의 비근한 데에서 출발하지만 지극한 데에 이르면 인간 심성의 이치와 하늘의 명령에 관한 고매한 것을 포함하였다.

선비는 학문을 통해 지식의 양적 · 축적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고, 도리를 확신하고 실천하는 인격적 성취에 목표를 두었다. 선비가 공부하는 대상으로서의 경전은 선비가 지향할 대상인 성인과 현인의 말씀을 간직하였다.

『소학』에서는 인륜을 밝히는 조목으로서 ‘오륜’을 제시하고, 자신을 공경하는 조목으로서 심술(心術) · 위의(威儀) · 의복 · 음식에 관한 규범들을 제시하였다. 『대학』에서도 자신의 내면에 주어진 ‘밝은 덕을 밝히는 일(明明德)’과 ‘백성을 친애하는 일(親民)’의 사회적 과제를 가르쳤다.

선비는 항상 자신의 인격적 도덕성을 배양하지만, 동시에 그 인격성을 사회적으로 실현하여야 한다. 따라서, 선비의 공부는 이치를 탐구하는 지적인 일과 행동으로 실천하는 행위적 일의 조화 속에서 이루어졌다.

선비는 자신의 덕을 사회 속에서 실현하기 위해 관직에 나가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따라서 일찍부터 과거시험을 치고 벼슬할 기회를 찾았다. 하지만, 대부분의 선비는 과거시험에 합격하지 못해서 벼슬길에 나가지 못하며, 소수의 선비들만이 과거시험을 거쳐 관직에 올랐다.

선비로서 관직에 나가는 것은 당연한 일이나, 관직을 목적으로 삼는 것이 아니라 관직을 통해서 자신의 뜻을 펴고 신념을 실현하는 기회를 얻는 것이다. 관직에 나가면 상관을 받들어야 하고 더구나 가장 높은 권위인 임금을 섬겼다. 그리고 아래로 백성을 돌보아야 하는 책임을 졌다.

선비는 임금과 신하라는 관계에서 무조건적인 복종과 충성을 바치지는 않았다. 선비는 임금과의 사이에서 의리로 관계를 맺기 때문에, 의리가 없으면 신하 노릇을 하지 않는 것이 도리였다. 바로 여기에 선비로서 관직에 나간 경우와 직업인으로서 나간 경우의 차이가 드러난다.

곧, 선비는 관직에 나가서도 그 직책의 성격과 임금의 역할에 대해서 언제나 성찰하며, 임금의 잘못이 있으면 간언하여 잘못을 바로 잡으려 하고, 바른 도리가 실현될 가능성이 없거나 맡은 바 직책이 도리에 합당하지 않다고 판단되면 물러났다.

조선 후기에 와서는 선비들이 과거시험을 외면하는 경향이 상당히 강해졌다. 그것은 과거시험공부, 곧 과업(科業 또는 科學)은 의리를 밝히는 도학공부와 심한 차이가 있다는 사실을 인식했기 때문이었다. 처음부터 벼슬길에 나갈 의사가 없이 과거공부를 멀리한 채 도학공부에만 전념하는 태도를 선비의 고상한 태도로 여겼던 풍조가 있었다.

선비는 관료생활에서도 매우 독특한 활동을 하였다. 곧, 처음부터 학문으로 확립한 신념과 포부를 가지고 세상을 위해서 봉사하려는 것인 만큼, 선비의 관직에 대한 태도는 관직을 통하여 자신의 학문과 신념을 펴는 것이다.

조선시대에는 선비들이 주로 맡는 관직으로 청환(淸宦)의 직책이 있었다. 이는 홍문관 · 예문관 · 성균관 · 사헌부 · 사간원 등 학문을 전문으로 하는 기관이나 언로(言路)를 맡아 임금에게 간언을 하던 직책이다. 때로는 선비들이 부모를 봉양하고 학문을 할 수 있는 한가로운 직책으로 지방의 수령을 자청하는 경우도 있었다.

선비들의 가장 활발한 관직활동으로는 경연관(經筵官) · 언관(言官) · 사관(史官)을 들 수 있다. 경연관은 임금을 교육시키며 시사문제에 대한 논평까지 맡아서 통치이념의 형성에 가장 큰 영향을 주기도 하였다.

언관은 임금의 실정(失政)을 직간(直諫)하며 공론을 임금에게 전달하여 통치행위의 정당성을 확인하는 임무를 맡고 있었다. 홍문관 · 사헌부 · 사간원의 대간(臺諫)이 간관으로서 간언을 담당하고 있지만, 선비는 어느 자리에서나 간언할 수 있는 것을 자신의 권리요 임무로 삼았다.

사관은 춘추관에서 역사를 기록하고 편찬하는 일이지만, 특히 선비는 사필(史筆:사관이 곧은 말로 기재한 필법)을 들었을 때 선과 악을 직필함으로써 임금을 비롯한 어떠한 권력의 불의도 은폐하지 않는 것을 임무로 하였다. 따라서 사관이 임금의 측근에서 사건을 기록하는 것은 임금의 행동을 규제하는 힘이 되며, 기록한 역사는 후세에 경계가 되기도 하였다.

선비들은 관직에 나간 경우에도 정치가 도리를 벗어나든지 임금이 간언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언제라고 관직에서 물러났다. 임금에게 사직(辭職)을 청하는 사직상소는 선비의 빈번한 행동양식이 되었다. 여기서 나아가고 물러서는 진퇴의 태도나 출처(出處)의 의리가 제기되었다.

선비는 나아가기를 어려워하고 물러서기를 쉽게 생각하는 태도를 요구하고 있는 것은 부귀의 욕망에 사로잡히지 않고 불의에 대한 거부적 비판정신을 확보하였기 때문이다.

선비로서 평생 과거시험을 보지 않거나 벼슬길에 나가지 않는 경우를 흔히 처사(處士)라 일컫는다. 처사는 물러나 집에 머무르는 경우도 가리킬 수 있었다. 다만 나아가 벼슬하는 경우에 비하여 물러나 집에 머물고 있는 처사가 더욱 높은 존경을 받는 경우가 많았다.

선비는 벼슬에 나가지 않더라도 좌절하지 않았다. 오히려 산 속에서 스승을 만나 학문과 도리를 연마하고 후진을 가르치며 벗들과 도의를 서로 권면하였다. 학문에 깊은 조예를 이루어 후생을 많이 가르치고 바른 도리를 제시할 수 있으면 ‘선생(先生)’으로 대우받았다.

선생은 벼슬에 나간 사람의 호칭인 ‘공(公)’에 비교해보아도 훨씬 더 높은 존숭을 받았다. 따라서 벼슬에 나간 선비도 여가에 제자를 가르치고 학문을 성취하여 선생으로 일컬어지기를 바라는 경우가 많았다.

선비가 벼슬에 나가지 않거나 벼슬을 그만두고 산림에서 학문을 연마하는 데 전념하고 있는 경우를 ‘산림(山林)’ 또는 ‘산림처사’라고 하였다.

이들 산림은 일종의 공동체를 이루었으며, 그들을 대표하는 ‘산림종장’은 정치적 영향력도 막대하였다. 산림은 사실상 그 사회의 공론을 주도하는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다.

산림의 선비로서 학문이 높고 명망이 있으면 왕은 이들이 과거시험을 거치지 않았더라도 ‘유일(遺逸)’의 경우로 높은 관직으로 불렀다.

이때 산림의 선비는 거듭 사퇴하는 상소를 올리면서 자신의 정치적 의견이나 현실문제에 관하여 의견을 피력하였다. 이렇게 높은 관직으로 불리어나간 선비들은 곧 물러나는 경우가 많으나 한 번 이상 관직에 불리어나간 선비는 ‘징사(徵士)’라고 하였다.

선비가 물러나 사는 곳은 번잡한 거리가 아니라, 한적하고 풍광이 아름다운 곳을 찾아 서실을 짓고 학문과 도리를 강론에 적합한 데서 마련하였다. 살림이 어려운 선비가 누추한 마을, 곧 누항(陋巷)에 사는 경우도 있었다.

선비들은 향촌에서도 서로 공동체를 이루어 의례를 통해 만났다. 곧 사상견례(士相見禮) · 향사례(鄕射禮) · 향음주례(鄕飮酒禮)는 선비들이 향촌에서 회합하는 의례이다.

특히 선비들은 유교의 도통(道統)을 존숭하여 성균관과 향교의 문묘(文廟:공자를 모신 사당)에 참배하기 위한 모임이 있고, 서원을 중심으로 그 지방의 선현을 제향하기 위한 모임도 있었다.

성균관과 향교가 국가의 기관으로서 관학적 성격이 강하다면, 서원과 서당은 선비들이 자유롭게 참여하는 공동체를 구성하였다. 이들은 제향을 비롯한 의례공동체를 구성하고 있지만, 이와 더불어 함께 학문을 강론하는 강학공동체를 이루었다.

특히 선비들이 노년에는 제자들을 육성하는 것을 주요 임무로 삼아서 학통을 형성하였을 때는 학통이 하나의 결속력이 강한 공동체를 이루었다.

선비들은 자신의 감회를 ‘시(詩)’로 표현하는 일이 일상적이었다. 선비들의 모임이 시회(詩會)로 이루어지는 경우도 흔하였다. 물론 선비는 시만 지어서는 도학의 선비가 되기에 부족한 문사(文士)에 머무를 수 있었다. 그러나 시에서도 선비의 시는 호탕하거나 애상적인 것이기보다는 단아하고 성실함을 지키는 선비다운 자세가 구별되었다.

자신의 학문을 제자들을 통하여 전하기도 하지만 직접 저술을 하여 후세에 가르침을 내려주는 것이 선비의 숭고한 임무이다. ‘한 시대에 나아가서 도를 시행하고(行道一世)’, ‘말씀을 내려주어 후세에 가르침을 베푸는 일(立言垂後)’은 선비가 지향하는 두 가지 기본적 방향이라 할 수 있다.

진유(眞儒), 곧 진실한 선비는 이 두 가지 역할을 겸할 수 있는 것이라 지적되기도 하였다. 선비들은 자신의 저술을 생존시에 반포하는 경우는 별로 없었다. 대부분의 저술은 죽은 뒤에 후손과 제자들이 편찬한 유고(遺稿)의 성격을 띠었다.

선비는 자신의 신념을 한 시대만이 아니라 만세에 전하려는 확신을 지닌 인격체라 할 수 있다. 도를 밝히고 자신을 연마하여 세상을 바로잡기 위해 도를 실천하는 노력의 과정이 선비의 일생이었다.

선비의 정신세계

이황(李滉)은 선비를 세력과 지위에 굴하지 않는 존재로 지적하였다. 그는 선비의 입장을 세속적 권세에 대조시켜서, “저들이 부유함으로 한다면 나는 인(仁)으로 하며, 저들이 벼슬로 한다면 나는 의(義)로써 한다.”라고 특징지었다.

선비는 유교이념을 수호하는 임무를 지녔기 때문에 유교이념 자체가 바로 선비정신의 핵심을 이룬다. 선비는 부와 귀의 세속적 가치를 따르지 않고, 인의의 유교이념을 신봉하였다. 특히 세속적 가치를 인간의 욕망이 지향하는 이익이라 한다면 선비가 지향하는 가치는 인간의 성품에 내재된 의리라 할 수 있다.

‘인’이 선비의 기본이념임에 틀림없지만 역사적으로 선비가 가장 강하게 자신의 입장을 드러내는 것은 ‘의’를 추구하는 의리정신으로 나타난다.

공자가 “군자는 의리에 밝고 소인은 이익에 밝다.”라고 한 주장에서 의리와 이익이 대립되는 ‘의리지변’(義利之辨)과 군자와 소인이 대립되는 ‘군자소인지변’의 분별의식이 명백히 확립되었다.

5세기 초 신라눌지왕 때, 박제상이 왕의 부탁을 받고 나서 “일이 쉬운지 어려운지 헤아려서 행동한다면 이를 충성스럽지 못하다 하고, 죽게 될지 살 수 있을 지를 꾀한 다음에 행동한다면 이를 용감하지 못하다고 한다.”라고 한 말에서도 의리를 위하여서는 쉽고 어려움이나 살고 죽는 것을 가리지 않는 강인성이 잘 나타난다.

“살기 위하여 ‘인’을 해치지 않으며, 죽음으로써 ‘인’을 이룬다.”라고 지사(志士)를 규정한 공자의 언급에서도 선비는 생명보다 더욱 귀한 가치를 신봉하고 있음이 보여진다. 맹자도 살고 싶은 욕망과 의를 지키고 싶은 욕구를 겸할 수 없을 때는 “살기를 버리고 의리를 선택하라.” 하고 가르쳐 의리를 생명보다 높이 여겼다.

신라의 화랑들이 무사에 가깝고 선비라 하기에는 어렵다 하더라도, 그들의 정신에서는 선비의 신념을 엿볼 수 있다. 황산벌 전장에서 김흠춘(金欽春)이 아들 반굴(盤屈)에게 “위급한 때를 당하여 목숨을 버릴 수 있다면 충성과 효도를 아울러 이룰 수 있다.”고 훈계하는 데서도 의리의 실천을 지상의 과제로 받아들이는 자세를 볼 수 있다.

선비는 주로 문사(文士)를 말하지만, 무사(武士) 또한 ‘사’의 조건을 갖추어야 한다. 곧 선비의 의리정신과 더불어 그 실천에서 생명조차 버릴 수 있는 신념의 용기를 요구하는 것이다.

고려 말에서 조선 초로 전환하는 왕조 교체기에 당시의 유학자와 선비들 사이에는 상반된 태도가 드러났다. 즉, 전통의 고려왕조를 수호해야 한다는 입장과 고려왕조를 멸망시키고 새로운 왕조를 세워야 한다는 입장이다.

이들 양쪽은 각각의 의리를 제시하고 있다. 곧 인간 본성에 근거한 하늘의 명령인 도덕률, 곧 ‘강상’(綱常:삼강오륜의 규범)에 따라 고려왕조를 지키겠다는 정몽주 등의 입장이 있고, 다른 쪽에서는 백성을 살리기 위해서는 왕권을 바꿀 수도 있다는 ‘혁명’의 의지를 지닌 정도전(鄭道傳) 등의 입장이 있었다.

하지만 혁명기가 지나고 수성기(守成期)인 세종시대에 들어오면서 선비의 의리는 강상적 충절에 있음을 확인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선비들은 정몽주와 길재를 잇는 도통을 선비정신의 모범으로 받들게 되었다.

삼강오륜의 도덕규범을 불변의 강상이라 받아들이고 이 강상을 의리의 중요한 형식으로 확인하는 것은 선비의 신념으로 이해될 수 있다. 따라서 세조단종의 왕위를 찬탈하였을 때 절의를 지켰던 사육신이나 생육신 등의 태도는 선비의 의리정신을 실천한 모범으로 추존되었다.

여성들에게는 효도와 충성에 더하여 정절이 요구되며, 강상을 지키며 학행이 갖추어질 때 ‘여사’(女士)라 일컬어지기도 한다.

강상의 규범으로 나타나는 의리의 경우 외에도 한층 더 큰 범위로서 ‘존양(尊壤)’의 의리를 들 수 있다. 존양은 ‘존중화 양이적(尊中華壤夷狄)’의 원리로서, 중국을 존숭하고 오랑캐를 물리치는 중국 중심의 의리이다. 이것은 ‘왕을 높이고 패자를 낮추는(尊王賤覇)’ 이른바 ‘춘추의리’와 일치하는 것이다.

유교이념에서는 의리의 가장 큰 문제로서 정통과 이단을 구별하고 중화문화와 오랑캐를 가려서 정통을 존중하고 중화문화를 지킬 것을 요구한다.

따라서 선비의 의리정신은 중화문화를 밝히고 존숭하는 것을 가장 중요한 과제의 하나로 삼았다. 그 예로서 정몽주의 의리정신이 고려왕조에 대한 충절보다도 오히려 원나라를 멀리하고 친명정책을 추구한 데 있다는 평가를 들 수 있다.

중화문화를 존숭하는 태도는 이른바 사대주의를 심화시켜서, 선비들이 모화사상(慕華思想)에 빠진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조선시대 선비들이 사대주의에 젖어서 자신의 국가를 잊은 것은 아니다.

다만 유교이념의 중국 중심주의적 해석에 끌려들어서, 자신의 국가를 변방의 제후국이라는 하위적인 위치에 두고, 중국을 높이며 중국문화를 이상으로 받드는 예속적인 한계점을 보였다. 원칙적으로 보면 사대의 원리는 수단적인 것이요, 사직(社稷)의 국가중심적 의식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 정당하였다.

선비들의 의리정신은 타민족의 침략을 당할 경우, 침략자를 불의한 집단으로 규정하고 의리에 따라 이에 항거하려는 태도로 표출되었다. 임진왜란 당시, 선비들의 항전을 의병(義兵)으로 인식함은 당연하였다.

조헌(趙憲)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700명의 선비들을 모아 의병을 일으켜 금산싸움에 임하며, “오늘은 다만 한 번의 죽음이 있을 뿐이다. 죽고 살며 나아가고 물러남을 오직 ‘의(義)’자에 부끄럼이 없게 하라.”고 명령하고는 모두 함께 죽음을 맞아, ‘칠백의사총(七百義士塚)’에 묻혔다. 이들은 ‘의’를 따라 죽은 것이며 이 순의정신(殉義精神)은 선비정신의 발휘라 할 수 있다.

병자호란 때에도 화친과 항복을 끝까지 거부하던 척화론(斥和論)은 선비의 의리정신을 보여주었다. ‘척화삼학자’의 한 사람인 홍익한(洪翼漢)은 심양에 끌려가서 청태종의 심문을 받을 때에도 “내가 지키는 것은 대의(大義)일 따름이니 성패와 존망은 논할 것이 없다.”고까지 대답하며 굴복하지 않다가 순절하였다.

이들이 나라의 위기를 당하여 생명을 버리면서까지 항거할 수 있었던 것은 나라를 지키는 것이 의리에 합당하다는 신념으로 강인한 선비정신을 보여주었다.

인조가 병자호란에서 항복하는 굴욕을 당한 후, 만주족인 청나라에 대한 복수 · 설치(雪恥)의식이 이 시대 선비들의 의리정신에 가장 중요한 과제를 이루었다.

특히 효종은 임금으로서 북벌정책을 주도하여, “나는 나의 재능으로 이 일을 해낼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다만 하늘의 이치와 백성의 마음이 그만둘 수 없는 것이니, 재주가 미치지 못한다고 하여 스스로 포기할 수는 없다.”라고 입장을 밝혔다.

효종의 북벌론은 이 시대 선비들의 의식을 가장 명확하게 제시해준 경우라 할 수 있다. 의리는 성공할지 실패할지 헤아린 다음에 태도를 결정하는 것이 아니다.

의리는 정당성을 제시하며, 선비는 이 정당성의 명령에 따라 어떠한 장애와 고난도 감수하고 자신의 태도를 결코 굽히지 않는 것이다. 선비정신은 의리정신으로 표현되는 데서 그 강인성이 드러난다. 의리는 변하지 않고 굽히지 않는 것이다.

신라의 진평왕눌최(訥催)는 백제군의 공격을 받았을 때 병졸들에게, “봄날 온화한 기운에는 초목이 모두 번성하지만, 겨울의 추위가 닥쳐오면 소나무와 잣나무는 늦도록 잎이 지지 않는다. 이제 외로운 성은 원군도 없고 날로 더욱 위태로우니, 이것이 진실로 지사(志士) · 의부(義夫)가 절개를 다하고 이름을 드러낼 때이다.”라고 훈시하고는 힘써 싸우다가 죽었다.

죽죽(竹竹)대야성에서 백제 군사에 의하여 성이 함락될 때까지 항전하다가 항복을 권유받자, “나의 아버지가 나에게 죽죽이라 이름지어준 것은 내가 추운 겨울에도 잎이 지지 않으며 부러질 지언정 굽힐 수 없도록 하려는 것이다. 어찌 죽음을 두려워하여 살아서 항복할 수 있겠는가.”라고 결의를 밝혔다.

여기서 소나무와 잣나무가 겨울이 되어도 잎이 지지 않는 사실을 들어 지조의 변함없음을 비유한 공자의 말씀은 선비정신의 강인한 지속성을 잘 보여주는 것이다.

선비는 결코 이기적 탐욕에 사로잡히지 않고, 공평하고 정당하여 치우침이 없는 도리와 사회 전체를 위하여 헌신적인 자세를 가진다.

조선시대 선비의 모범이라 할 수 있는 조광조(趙光祖)는 선비의 마음씀을 지적하여, “무릇 자신을 돌보지 않고 오직 나라를 위하여 도모하며, 일을 당해서는 과감히 실행하고 환난을 헤아리지 않는 것이 바른 선비의 마음씀이다.”라고 하였다.

이에 반하여 소인의 태도를 “자신을 위하여 도모하는 데 깊고 세상을 살아가는 데 주도한 자는 감히 저항하는 지조와 곧은 말로 원망과 노여움을 부르지 못하며, 머리를 숙여 아래 위를 살피고 이쪽 저쪽을 주선하여 자신을 보존하고 처자를 온전히 하는 자가 대개 많으니, 이들은 왕을 섬기고 나라를 근심하는 사람이 아니다.”라고 지적하였다.

선비정신은 이기심을 넘어선 당당하고 떳떳함을 지닌다. 비굴하지 않고 꼿꼿하며 의심하지 않고 확고함을 지닌다. 이황은 선비의 당당한 모습을 가리켜, “선비는 필부로서 천자와 벗하여도 참람하지 않고, 왕이나 공경(公卿)으로서 빈곤한 선비에게 몸을 굽히더라도 욕되지 않으니, 그것은 선비가 귀하게 여겨지고 공경될 까닭이요, 절의(節義)의 명칭이 성립되는 까닭이다.”라고 언급하였다.

그는 또한 “선비는 예법과 의리의 바탕이며 원기(元氣)가 깃든 자리이다.”라고 하여 선비를 모두 예법 · 의리의 주체요, 사회적 생명력의 원천이라 본다. 선비는 신분적 존재를 훨씬 넘어서 하나의 생명력이요 의리정신의 담당자임을 밝힌 것이다.

이이(李珥)는 선비를 정의하면서, “마음으로 옛 성현의 도를 사모하고, 몸은 유교인의 행실로 신칙(申飭:단단히 타일러 경계함)하며, 입은 법도에 맞는 말을 하고, 공론(公論)을 지니는 자이다.”라고 지적하고, “사림(士林)이 조정에 있어서 사업을 베풀면 나라가 다스려지나, 사림이 조정에 있지 못하고 공허한 말을 하게 되면 나라가 어지러워진다.”라고 하였다.

선비의 행동과 사회적 기능에서 보아도 선비는 유교이념을 신념으로 지키고 실현할 것을 추구하는 인격적 주체이다. 이들은 유교적 인격의 기본 덕성을 전반적으로 담당하고 있다.

‘인(仁)’의 포용력과 조화정신은 선비의 화평하고 인자함으로 나타나며, 예의는 선비의 염치의식과 사양심으로 표현되고, 믿음은 선비의 넓은 교우를 통해서 드러난다.

선비는 평상시에 화평하고 유순한 마음으로 지공무사(至公無私:지극히 공평하고 사사로움이 없음)한 중용을 지켰다. 그러나 의리의 정당성이 은폐될 때에는 가장 예민한 감각으로 엄격하게 비판하고 배척하는 정신을 결코 잃지 않았다.

선비정신의 근대적 성찰과 실현

도학이 정착하면서 선비의식은 어떤 시대보다도 선명하고 자각적인 것으로 나타나고, 사회적으로도 선비가 주도세력으로 꾸준히 성장하였다. 하지만 선비가 정치의 담당자로 부상하여 사림정치를 하게 된 선조 때에 이르러서는 사림들 자체가 내부의 분열을 일으키고 서로 대립하게 되었다.

이른바 당쟁이 시작되자 당파는 계속하여 핵분열을 거듭하였고, 서로 비난하던 주장들이 정치권력의 주도권을 장악하기 위하여 살육전을 일으키기도 하였다. 당쟁은 출발점에서 보면 선비정신의 기본 이념에 따라 ‘군자 · 소인론’으로 비판하는 입장이었다.

스스로를 반성하고 다른 이의 좋은 점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군자라 칭하고 남을 소인으로 비난하면서 서로 격심한 적대감을 일으켰다. 권력의 부당성을 비판하면서 견제할 때는 순수한 입장을 지켰으나, 권력의 주체가 되자 선비는 엄청난 권위를 독점하게 되었다.

선비의 신념이 도리의 권위를 지니고 있는 경우를 넘어서 실질적으로 권력의 권위를 지니게 되자, 선비는 지배자로서 서민 대중을 억압하고 착취하는 구실을 하였다. 이것은 선비의 타락상이요, 진실한 선비의 모습의 상실이다.

또한 선비는 국가권력에 참여하지 않을 때에는 지방의 향촌에서 온갖 특권을 누렸다. 국가가 선비를 우대하도록 요구하였고 선비는 봉사자가 아니라 권력의 향유자로 군림하게 되었다.

선비는 사회의 문화와 규범을 담당하는 역할을 맡았다. 하지만 선비의 문화적 기준은 한문자의 중국문화에 젖어 민족문화의 자주성과는 유리되는 문제점을 안고 있었다.

이로부터 유교문화가 점점 세련되면서 서민문화는 더욱 위축되거나 유리되는 분열을 일으켰다. 이른바 반상(班常)의 차별이 더욱 철저하게 정착되었다. 이러한 신분주의가 심화되면서 사회적인 조화가 점차 쇠퇴하고 계층 사이의 분열이 더욱 심화되었다.

선비문화의 중요한 특징인 규범체계는 사회의 도덕적 질서를 확보하는 기능을 갖는다. 그러나 이 규범들이 선비의 계층적 권위를 드러내기 위해서 강화될 때, 특히 의례는 형식화하기 시작하였다. 의례를 매우 섬세하게 조직하고 의례의 완벽한 집행자가 아니면 신분적인 권위를 유지하지 못하게 되었다.

사대부의 예의범절은 지나친 형식주의에 빠지면서 실질적 효용성을 외면하고 말았다. 이러한 선비문화가 도학파의 정통성이 강화되면서 더욱 확고하게 정착되고, 동시에 폐단을 낳았다.

이에 대하여 조선 후기로 넘어오면서 이러한 도학적 관념성과 형식성에 대한 반성을 하고 실질적 효용성에 대한 관심을 높였던 새로운 학풍이 대두되었다. 이것이 곧 실학(實學)의 등장이다.

실학사상을 이끌어갔던 세력도 역시 선비들이었다. 그러나 이들 실학파의 선비들은 도학적 선비문화의 문제점에 대해 예리하게 반성하고, 폐단을 개선하기 위한 방안을 구체적으로 제시하였다.

실학파의 선구적 인물인 유형원(柳馨遠)은 신분의 귀천이 문벌에 의하여 세습되는 것을 비판하여, “예법에는 나면서부터 귀한 자가 없다.”라고 하여 상하의 서열을 재덕(才德)과 연령에 따라서 나눌 것을 주장하였다. 그것은 선비가 재주나 덕이 아니라 신분적으로 사대부로 태어나고 있는 사실을 반성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러한 인식은 실학파의 학자들 사이에 사대부 내지 양반에 대한 사회적 기능과 지위를 재평가하는 문제의식을 불러 일으켰다. 박지원(朴趾源)「양반전(兩班傳)」에서 양반의 가식적인 행동규범과 지배계층으로서의 탐학상에 대해 조목을 열거하여 조소적으로 비판한 것도 신분제도에 대한 비판이다.

그는 선비의 구실을 재평가하면서 농사를 밝히고 상품을 유통하게 하고 공장(工匠)에게 은혜롭게 하는 것이 바로 선비의 학문이라 지적하였다. 이와 더불어 그는 당시에 농 · 공 · 상의 상민(常民)이 생업을 잃는 것은 선비가 실학을 하지 않은 과오라고 반성하고 있다.

선비는 도덕규범만 담당하고 생산을 외면할 것이 아니라, 직접 생산에 참여하여 산업을 성장시키는 데서 그 사회적 책임을 다할 수 있다고 지적하였다.

재화의 생산이 인간생활에 필수적인데, 선비가 의리만 내세우며 재화를 비천한 것으로 보는 의식을 비판하였다. 곧 재화의 생산활동이 바로 도덕적임을 인정하며, 오히려 생산은 하지 않고 놀고 먹는 행위의 부당성을 지적하여 선비가 놀고 먹는 유식계층(遊食階層)이 되고 있음을 비도덕적인 것으로 비판하였다.

이익(李瀷)은 자신이 전형적인 선비인데도 “나는 실 한 오리, 낟알 한 알도 생산하지 못하고 있으니 어찌 좀벌레가 아니겠는가?”라고 자책하였다.

정약용(丁若鏞)도 “선비란 어떤 사람인가. 선비는 어찌하여 손발을 움직이지도 않으면서 땅에서 생산되는 것을 삼키며 남의 힘으로 먹는가?”하고 선비의 무위도식을 힐난하였다.

그것은 도의를 연마하는 선비에게 노동을 통해 생산에 종사하는 평민을 천시할 아무런 권리도 없음을 강조하는 것이요, 노동의 신성성을 적극적으로 긍정하는 주장이다.

박지원은 「양반전」을 통하여 사대부의 기만성을 비판하고, 「마장전(馬駔傳)」에서는 군자가 명예와 세력과 이익을 말하기를 꺼려하는 것은 그것을 독점하려는 심술이라고 꿰뚫어 보았다.

그는 「마장전」의 한 주인공이 “차라리 벗이 없을지언정 군자와는 벗할 수 없다.”라고 선언하고 옷과 갓을 찢어버리고 머리를 풀어 거리에서 미친 듯 노래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리고 이를 통해 당시의 선비가 지닌 허위성에 얼마나 심한 혐오감을 갖고 있었는지 드러낸다.

「호질(虎叱)」에서도 위선적인 도학자인 주인공을 호랑이의 입을 빌려서 질책하면서 “유(儒: 선비)는 유(諛: 아첨하는 자)이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그는 선비의 도학적 폐단을 비판하여, “선비가 성명(性命)에 관해 고담준론만 하면서 세상을 경륜하고 백성을 구제할 방법을 저버리고 시문이나 헛되이 숭상하니 정치에 시행되는 것이 없다.”라고 반성하면서도, 선비의 참된 의미를 자각하고 있다.

그는 “선비가 작위를 가지면 선비를 버리고 대부나 경이 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작위도 ‘사’에 부착되었다. 천자도 작위는 천자이지만 그 몸은 선비이니, 천자를 원사(原士)라 한다.”라 하여 선비를 일반적 인격개념으로 확인하였다.

홍대용(洪大容)도 선비를 분류하여 과거시험으로 출세하는 재사(才士)와 글재주로 이름을 얻는 문사(文士)와 경전에 밝고 행동을 점잖게 꾸미는 경사(經士)로 나누어 열거한 후, “진정한 선비는 인의에 깊이 젖고 예법을 따르며, 천하의 부귀로도 그 뜻을 어지럽히지 못하고, 누추한 마음의 근심으로도 즐거움을 대신하지 못하며, 천자도 감히 신하로 삼지 못하고 제후도 감히 벗 삼지 못하며, 현달하면 은택이 사해(四海)에 미치고, 물러나면 도(道)를 천년토록 밝히는 진사(眞士)이다.”라고 하였다.

선비의 바른 기풍을 추구하는 것은 도학자들 사이에도 있었지만, 선비의 허위적 면모를 성찰하고 진실한 모습을 추구하는 것은 실학의 중요한 과제이기도 하였다.

한말에 이르러서는 도학이 다시 활기를 찾아 융성함을 보였다. 곧 선비정신이 쇠퇴할 때 유교이념도 은폐되고, 선비정신이 살아날 때 유교이념도 활력을 찾았다.

한말에 이른바 척사위정파(斥邪衛正派)의 선비들은 이 시대의 기본과제가 유교이념의 전통에 배반되는 이념들을 거부하고 도학의 이념을 수호하는 것임을 밝혔다. 곧 도학정통에 상반되는 이단으로서 천주교를 배척하였고, 도학적 의리에 배반되는 오랑캐로서 서양의 침략세력을 거부하였다.

이들은 도의 정통성에 대한 신념과 우리 민족의 문화적 우월성에 대한 신념을 확고하게 지녔다. 병인양요(1866)를 당하자 척사위정론의 대표적 인물인 이항로(李恒老)는 “선비로서 한번 이상 왕명을 받은 자는 평일에 있어서는 마땅히 사퇴하는 것으로써 의리를 삼아야 하지만 일단 국가에 환란이 있게 된 때에는 즉각 달려가 협력하는 것으로서 의리를 삼아야 한다.”라고 하여, 위기의 상황에 선비의 적극적인 참여자세를 강조하였다.

이들은 서양문물의 침투가 가중되면서 서양의 위협을 정치적인 것에 앞서서 문화적 내지 도덕적 성격의 것으로 파악하는 유교이념의 입장을 확인하였다. 곧 인간의 욕망을 개방하여 인간으로 하여금 재화를 유통하게 하고 여성을 자유로 접촉하게 하는 통화(通貨) · 통색(通色)의 성격으로 서양문화를 규정지었다.

이에 따라 서양문화를 오랑캐의 것으로 규정하며, 종래에 서사(西士)라 부르던 서양 선교사를 서호(西胡)라 고쳐 불러야 한다고 주장하여 선비와 오랑캐를 엄격히 구분하는 배타적 비판의식을 보여주었다.

정부가 개항과 더불어 개화정책을 취하게 되자 한말 도학자들은 정부의 입장을 정면으로 비판하였다. 이항로의 제자 유중교(柳重敎)는 “선비란 조정에서 아무 것도 받은 바가 없을지라도 그의 자리는 천위(天位)요, 그의 임무는 천직(天職)이다.”라고 하여 선비가 하늘로부터 받은 지위와 직책을 담당하는 신분으로서 군왕(君王)의 세속적 권력을 넘어서 있음을 확인하였다.

따라서 그는 “천자라 할지라도 선비의 몸을 죽일 수 있지만 선비의 뜻을 빼앗을 수는 없다.”라며 선비의 지조는 왕권 위에 있음을 밝혔다.

또한 “천직은 무겁고 임금의 명령은 가볍다.”라고 하여 하늘로부터 부여받은 직분인 천직을 왕명이 부당할 때는 거부할 수 있는 선비의 근거로서 강조하였다.

일본의 침략이 강화되자 도학파의 선비들은 일본에 저항하여 항거하는 방법을 모색하게 되었다. 이항로의 제자인 유인석(柳麟錫)을미의병(1896)을 일으키면서 선비의 저항정신을 밝혔다. 곧 그는 “죽음은 선비의 의리이다.”라는 신념을 제시하였다. 그러나 그는 선비가 국가존망의 위기에 처해 침략자에 대한 항의로서 의병을 일으킬 것만을 주장하지는 않았다.

즉, 그는 선비가 국가변란의 위기에 대처하는 3가지 방법으로서, 하나는 의병을 일으켜 거역하는 무리를 쓸어내는 거의소청(擧義掃淸)이요, 둘째는 떠나서 옛제도를 지키는 거지수구(去之守舊)요, 셋째는 죽음으로써 지조를 온전히 하는 치명수지(致命遂志)의 행동방법을 제시하였다.

이 시대 선비들은 의병을 일으키거나 자결을 하여 지조를 강경하게 드러내며, 또는 산속으로 은거하거나 해외로 망명하여 전통제도를 고수함으로써 선비의 절의정신을 발휘하였다.

그러나 도학의 척사위정론이 저항정신에 사로잡혀 보수적이고 폐쇄적인 수구론(守舊論)을 주장한 데 반하여, 시대의 새로운 사조를 받아들여 개혁을 추구함으로써 자강정책(自强政策)을 추구하는 개화파가 대두하였다.

온건한 개화파는 유교적 신념을 기반으로 하면서 서양 근대문물을 수용할 것을 시도하였다. 이 수용론에서 한 걸음 나아가 유교개혁사상이 출현하였다. 곧 유교전통의 폐단에 대해 과감한 비판과 반성을 거쳐서 새로운 유교정신의 수립을 추구하는 입장이었다. 이들 유교개혁사상가는 이 시대에 애국계몽사상가로서 활동하고 있었다.

그 가운데 박은식(朴殷植)은 구습에 젖은 4가지 사회집단 가운데 그 첫째로서 유림가(儒林家)를 지적하였다. 그는 당시의 일반 여론이 유림을 비판하는 문제점을 열거하였다.

고루하여 시의(時宜)에 어두움, 자기도취에 젖어 백성과 나라를 망각함, 옛날 책만 연구하고 새 이치를 연구하지 않음, 공허하게 의리를 논하고 경제를 강구하지 않음 등을 들어 유림이 개명한 시대의 일대 장애물이 됨을 지적하였다.

이러한 박은식의 입장에서는 전통적인 선비가 비판의 대상이 되는 것이 아니고, 전통의 습관을 고수하는 당시의 고루한 유림을 비판한 것이다. 즉 당시의 유림들을 고루한 장애물로 비판하고, 이에 반하여 새로운 지식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사회개혁운동을 하는 계몽사상가를 선비의 모범으로 제시하였다.

유인식(柳寅植)은 정부와 유림의 부패상을 조목별로 열거하여 비판하면서, 전반적으로 당시의 제도와 명분이 허위에 젖어 있음을 지적하였다.

그는 “성리학이 전날의 학술이었다면 자연과학은 오늘의 학설이요, 전통의 의관이 전날의 예속이었다면 양복 입고 머리 깎는 것은 오늘의 예속이다.”라고 하여 전통의 근본적 변혁을 요구하였다.

장지연(張志淵)이 유교개혁운동을 전개하면서 진화 · 평등 · 겸선(兼善) · 강립(强立) · 박포(博包) · 지성(至誠)의 6대주의를 개혁원리로 제시하는 데서도, 새로운 선비상이 진보와 평등의 이념을 추구하는 근대적 가치의 담당자임을 이해할 수 있다.

사실상 애국계몽사상가들은 선비의 신분적 특권이나 구실의 가능성을 더 이상 허락하지 않는다. 이제 국민 대중의 교육을 통하여 새로운 청년세대의 지식층에 기대를 하고 있는 것이다.

일제의 억압에 맞서 애국계몽사상이 활발하게 전개되었을 때, 다른 한편 전통 도학의 선비들은 혹독한 비판을 받았지만 오히려 산간에 은둔하여 끈질기게 일제의 억압정책에 항거하였다. 일제의 민적(民籍) 등록을 거부하고 창씨개명(創氏改名)의 강요에도 저항하였다.

일제하의 선비는 일본의 동화정책에 끈질기게 저항하였다. 단발의 강요에 응하지 않았고, 일본말을 입에 올리지 않았다. 심지어는 일본인이 설치하였다고 철도를 이용하지 않았고, 신학교에 자녀들을 입학시키지도 않았다.

이러한 저항정신은 선비들의 강인한 민족의식이 발현된 것으로 존중될 수 있지만, 이미 변혁된 사회에서 그 지도적 기능을 상실했음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선비정신의 현대적 의의

박지원이 조선시대의 선비가 지닌 사회기능적 성격을 규정한 것은 일종의 종합적인 결론을 내린 것이라 볼 수 있다. “천하의 공변된 언론을 사론(士論)이라 하고, 당세의 제일류를 사류(士流)라 하며, 온 세상의 의로운 주장을 펴는 것을 사기(士氣)라 하고, 군자가 죄 없이 죽는 것을 사화(士禍)라 하며, 학문과 도리를 강론하는 것을 사림(士林)이라 한다.”

그는 또한 선비의 도덕적 · 인격적 위치를 해명하여, “효도와 우애는 선비의 벼리요, 선비는 사람의 벼리이며, 선비의 우아한 행실은 모든 행동의 벼리이다.”라고 언급하였다. 전통사회에서 선비는 분명히 그 사회의 양심이요 지성이며 인격의 기준으로 인식되었고, 심지어 생명의 원동력인 원기라 지적되었다.

삼국시대부터 조선사회에 이르기까지 그 시대적 양상에는 차이가 있다 하더라도, 선비는 언제나 지도적 구실을 하는 지성으로서의 책임을 감당해왔다. 이처럼 개화 이후에도 시대이념을 수호하고 이끌어가는 주체로서 지성인의 구실이 요구되었다.

독립투쟁기에는 의사(義士) · 열사(烈士)가 요구되고, 산업성장기에는 경영자 · 기술자가 요구된다. 그리고 선비는 언제나 그 사회가 요구하는 이념적 지도자요 지성인을 의미할 수 있다. 여기에서 전통의 선비상은 우리 시대에서도 의미 있는 선비의 조건을 제시해준다.

곧 선비는 현실적 · 감각적 욕구에 매몰되지 않고, 보다 높은 가치를 향하여 상승하기를 추구하는 가치의식을 지닌다. 그리고 그의 신념을 실천하는 데 꺾이지 않는 용기를 지닌다. 자신의 과오를 반성할 줄 아는 성찰자세가 필요하며, 사회의 모든 계층을 통합하고 조화시키는 중심의 구실이 있다.

선비는 이제 신분적 존재가 아니라 인격의 모범이요, 시대사회의 양심으로서 인간의 도덕성을 개인 내면에서나 사회질서 속에서 확립하는 원천으로 이해될 수 있다.

참고문헌

『한국의 선비문화』(국제문화재단 編, 시사영어사, 1982)
『조선시대 선비연구』(이장희, 탐구당, 1989)
『조선시대 유교문화』(최봉영, 사계절, 1997)
「정암(靜菴)과 조선시대의 선비정신」(금장태, 『유교와 한국사상』, 성균관대학교 출판부, 19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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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선비정신 연구」(최봉영, 『정신문화연구』 가을호, 1983)
「이조유교정치와 ‘사림’의 존재」(이우성, 『한국의 역사상』, 창작과 비평사, 1982)
집필자
금장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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