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0년 일제 병탄 직후 배화학당에서 교편을 잡았던 남궁억(1863~1939, 南宮檍)은 고향 모곡리로 돌아와 조선총독부에 맞서 무궁화 보급운동을 펼쳤다. 1919년 가을에는 사재를 털어 예배당을 설립하였고, 모곡리 근처에 학교가 없는 것을 알고 보리울학교를 세웠다. 또한 일제의 탄압을 피해 뽕나무 묘목 속에 감추어 무궁화 묘목을 길러 각 지방 학교와 교회·사회단체에 보급했는데, 남궁억의 무궁화사랑 정신은 많은 학생들에게 민족정신을 갖도록 했다.
남궁억의 애국사상을 접한 홍천군 서면 모곡리 일원의 일부 기독교감리교계 목사와 신자들은 1933년 4월 하순 ‘공존공영의 지상천국 건설’을 목표로 십자가당을 결성했다. 십자가당은 홍천 모곡리에서 기독교 민족주의자 한서 남궁억의 영향을 받은 감리교 교인들의 주도하에 조직된 단체였다.
십자가당 결성 직후 점조직을 통해 비밀리에 신규 위원을 늘려나가는 단계에서 “평소 모곡학교를 중심으로 불오한 사상이 떠도는 것을 예의 주목하던” 홍천 주재소 순사들은 이들을 주목하였다. 그리고 11월 4일 일본 경찰은 남궁억과 그 주변 인사들을 체포하여 심문하였는데, 당시 십자가당 일원이자 남궁억의 제자로 모곡학교 교사를 지낸 김복봉의 일기장을 압수하여 검토하는 과정에서 십자가당의 전모가 드러났다. 홍천 지역 비밀 결사 조직을 파악한 일제는 유자훈, 남천우, 이윤석, 김복동, 남궁식, 김재인, 김경환, 이기섭, 송완식 등 십자가당 당원 전원을 즉각 체포, 심문하였다. 40여 일간 일제 경찰에 혹독한 취조를 받은 다음 구속된 이들 10명은 1933년 12월 14일에 모곡학교의 민족운동 관련자인 남궁억, 남궁경순 등과 함께 서울로 송치되어 총독부 검사에게 심문을 받았다.
1934년 8월 3일 유자훈, 남천우, 김복동, 남궁억이 최종적으로 공판에 회부되어, 1935년 1월 31일 유자훈과 남천우는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각각 1년 6개월 형을 선고받았고, 남궁억은 10개월, 김복동은 6개월 형을 선고받았다.
십자가당 관련자들의 항일활동에 대해 당시 민족지들은 “민족주의에다 공산주의를 가미한 내용을 가진 단체를 조직했다.”거나 “체코슬로바키아의 ‘쏘콜운동’을 모방하여 조선에도 그와 같은 민족운동을 일으키려 했다.”는 평가를 실었다. 일제는 투옥중인 십자가당의 지도자인 유자훈 목사의 ‘범죄사실의 개요’란에 “조선독립을 막는 현재의 사회제도를 파괴하고 사유재산제도를 부인하고 공산주의사회를 건설하기 위해 십자가당이란 비밀결사를 조직했다.”고 적어 놓았다.
남천우와 이윤석은 민족주의 사상을 가진 기독교인이었고, 유자훈은 사회주의 사상을 가지고 있는 기독교인이었다. 이들이 주축이 된 십자가당은 기독교, 민족주의, 사회주의 등 3가지 상호 이질적인 종교와 사상을 기독교의 삼위일체식으로 합일시켜 ‘공존공영의 천국’을 지상에 건설하고자 했다. 이들은 이러한 3가지 사상을 융화시켜 일본제국주의에서 한민족을 해방시키고 기독교적인 사회주의 국가를 건설하려는 이상을 갖고 있었다. 이에 따라 임진왜란 때에 왜군을 물리친 이순신, 종교운동가 겸 사회개혁가로서 남감리교를 통일한 요한 웨슬레, 러시아에서 사회주의혁명을 완수한 레닌 등을 가장 존경할 만한 인물로 꼽았다.
이런 기록들로 미루어 보면, 십자가당은 기독교에 기반한 사회주의적 민족운동을 추진하려던 비밀 결사였음을 알 수 있으며, 또한 십자가당 사건은 당시 사상을 초월한 기독교인들의 항일운동이 시도되었다는 것을 알려주는 계기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