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5년 강원도 홍천에서 출생했다. 1928년 협성신학교를 졸업한 후 강원도에서 목회하였다. 1932년 비밀 항일결사인 ‘십자가당’을 조직하고 당수로 활동하다가 3년간 옥고를 치렀다. 1943년 대전제일감리교회 목사로 전임하였고, 해방 후에는 건국 준비 단체인 독립촉성국민회 충청남도 지부장을 지냈다.
1913년 강원도 홍천공립보통학교 졸업, 1915년 경성 휘문고등보통학교를 중퇴했다. 1919년 세례를 받고 기독교인이 되었으며 홍천지역의 3·1만세운동을 주도했다. 1928년에 협성신학교를 졸업한 후 강원도 양구와 인제 그리고 홍천에서 목회를 했다.
강원도 모곡에서 활동하던 남궁억(南宮檍)과 함께 민족운동을 벌이던 그는 1932년 기독교인 중심의 항일 비밀결사인 ‘십자가당’을 조직하고 그 당수가 되었다. 다음 해인 1933년 이것이 발각되어 3년간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만주로 건너가 공주령 감리교회를 담임하면서 1938년부터 만주감리교신학교 교수를 겸했다. 이후 자신의 뜻을 굽혀 일제의 황민화 정책에 협조하기 시작했고, 1943년 대전제일교회에 부임한 그는 일본기독교 조선감리교단 상임위원 겸 함경교구장에 임명되었다. 1944년 대전보육원장을 맡았으며, 1945년 일제의 조선기독교 통폐합과 일본기독교로의 편입방침에 따라 일본기독교 조선교단이 성립하자 충남교구장에 임명되는 등 일제의 기독교 탄압 정책에 깊이 관여했다.
해방 후 정당정치 활동에 참여하여 이승만 계열의 독립촉성국민회 충남지부장으로 활동하였고, 1948년 5월 10일의 제헌의원 선거 당시 대전에서 출마했지만 낙선하였다. 1947년에는 대전중앙감리교회를 세워 정치와 목회를 병행하였다. 1957년에는 자유당의 부정선거에 항의하다 6개월간 옥고를 치렀다. 1960년 정계에서 은퇴한 이후 대훈농목장을 경영하다가 1969년 6월 30일 사망했다.
1990년 ‘십자가당’ 사건과 관련하여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으나, 친일 행적이 드러나 2010년 서훈이 취소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