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수원 출신으로, 본관은 순흥(順興)이다. 1894년 11월 18일 출생하여 1919년 4월 15일 사망하였다.
안무순(安武淳)은 1919년 3월 31일 향남면 발안 장날을 이용하여 장터에서 1천여 명의 시위 군중과 함께 태극기를 앞세우고 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 시위 군중은 일본인 소학교, 면사무소에 투석하고 불을 지르며 만세를 연호하였다. 치안 상황이 점차 불안해지자 일제는 발안 거주 일본인들을 삼계리로 피신시키고 경계태세를 강화하였다.
수원경찰서 소속 순사부장 노구치 히로조[野口廣三]의 타살에 이어 화수리 경찰관 주재소 소속 순사 가와바타 도요타로[川端豊太郞]가 참살되는 등 수원 지역 3 · 1운동이 거세게 전개되자 일제는 우정면, 장안면, 팔탄면, 송산면 등 수원 전역에 대한 보복과 진압작전에 들어갔다.
1919년 4월 15일, 79연대 소속 일본군 중위 아리타 도시오[有田俊夫]가 보병 11명을 이끌고 제암리 마을에 도착한 후, 마을 성인 남자들을 제암리 교회에 불러 모았다. 그리고 출입문을 잠그고 가둔 채, 집중사격을 가하였다. 이어 고주리로 가서 독립운동가 김흥렬(金興烈) 가족 6명을 참살하였다.
일제는 사건을 은폐하기 위해 교회와 마을에 불을 지르기까지 하였다. 이 사건으로 제암리에서 23명, 고주리에서 6명, 총 29명이 사망하였는데 이때 안무순도 현장에서 순국하였다.
1968년 대통령표창,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