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윤식은 일제강점기, 경기도 양평군 강상면 · 강하면 · 양서면 · 고읍면이 연합하여 전개한 3 · 1운동에 참여한 독립운동가이다. 1919년 4월 3일 양평군 연합시위에 참여하였다. 양부인 최대현이 주도하였던 고종 승하 애도 기부금 모집 과정에 참가하여 취지문을 인쇄하고 배포하였다. 3월 31일부터 4월 2일까지 연이어 만세시위를 벌였고, 4월 3일 강상면 · 강하면 · 양서면 · 고읍면 4개 면 연합시위에 참여하였다. 시위 과정에서 일제 경찰의 총탄에 맞아 순국하였다.
경기도 양평군 강하면 전수리 출신으로, 1896년 2월 24일 태어났다. 1919년 4월 3일 양평군 일대에서 진행된 만세시위에서 총탄에 맞아 사망하였다. 양평군 4개 면 시위를 주동한 최대현(崔大鉉)의 양자(養子)이다.
1919년 2월 중순 양부(養父)인 최대현이 작성한 고종황제의 승하(昇遐)를 애도하는 제사를 올리기 위한 기부금 모집 취지문을 인쇄하고 배포하였다. 이후 3 · 1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되자, 최윤식(崔允植)은 최대현과 함께 양평군의 독립만세시위에 적극 참여하였다.
경기도 양평군 강상면, 강하면, 양서면, 고읍면 일대에서는 3월 31일부터 4월 3일까지 4일 동안 연이어 만세시위가 전개되었다.
3월 31일 강하면 운심리 강하면사무소 앞에서 최대현이 300여 명의 군중을 이끌고 만세시위를 주도하였다.
4월 1일 양서면 도곡리 양서면사무소 앞에서 약 2,000여 명이 만세시위를 벌였다. 양서면사무소 앞에서는 다음날인 2일에도 1,000여 명이 모여 만세시위를 하였다.
4월 3일 강상면, 강하면, 양서면, 고읍면 등 4개 면민 4,000여 명이 고읍면에 모여서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이날의 주동자들은 면직원들에게 투항하라고 강권하였으며, 위협적으로 면민들에게 시위 참가를 독려하였다. 또한, 천도교도와 야소교도들은 총탄에 맞지 않는다고 선동하면서 시위를 이끌어 나갔다고 한다.
양평면 양근리로 행진하면서 시위가 격렬해지자, 양평 헌병분견소에 주재하는 헌병이 해산을 명령하며 발포하였다. 이 과정에서 최윤식은 일제 경찰이 쏜 총탄에 맞아 사망하였고, 고령의 최대현은 지팡이를 휘두르며 행진을 독려하였다. 시위 군중은 돌을 던지고 몽둥이를 휘두르며 읍내로 몰려들었으며, 이 와중에 6명이 사망하였다.
2014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