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안북도 정주 출신으로, 출생 연도는 미상이다. 3 · 1운동 당시 평안북도 정주군의 천도교구장으로 활동하였다. 1919년 3월 31일 시위 과정에서 사망하였다. 최제일(崔濟一)이라고도 한다.
정주군에서는 1919년 3월 중에 여러 번의 시위가 전개되었다. 3월 1일에는 시위 계획이 누설되어 시위가 무산되었고, 3월 8일에는 500여 명이 참가한 시위가 진행되었다. 이어 정주 장날인 15일에는 50여 명이 시위에 참가하였다.
3월 31일에는 정주군 내의 천도교인과 기독교인이 연합하여 대규모 만세시위가 진행되었는데, 천도교구장 최석일(崔晳一)은 중심적인 역할을 수행하였다.
정오경에 정주읍 주변으로 3,500-4,000여 명의 군민들이 모여들었다. 오후 2시경 ‘대한국독립단(大韓國獨立團)’ 깃발을 앞세우고 태극기를 손에 들고서 읍내로 진입하려 하였다. 남문 근처 정주우편국 근처까지 진출하여 만세를 고창하였으나, 선두에서 태극기를 흔들며 시위를 주도하던 최석일은 일본군 중위 도비타[飛田]가 휘두른 칼에 양팔을 잃고 현장에서 순국하였다.
정주군청 쪽에서 군중들에게 밀린 헌병들은 발포하기 시작하였으며, 이 과정에서 많은 사람들이 사상을 당하고 체포되었다. 이날 시위 진압에는 헌병과 함께 조선군 77연대 보병이 투입되었다. 헌병의 발포로 여성 1명을 포함한 28명이 사망하고, 99~101명이 부상을 입었으며, 105명이 검거되었다고 발표되었다. 그러나 한 외국인 선교사는 당일 57명이 사망하였고, 총상을 입은 사람 중 20여 명이 더 죽었다고 보고하였다.
일본 헌병은 이틀 후인 4월 2일 정주군 천도교구 건물과 오산학교(五山學校), 용동(龍洞) 교회에 방화를 자행하였다. 3월 31일 정주군에서 일어난 학살은, 경기도 제암리 학살사건과 함께 3 · 1운동 과정에서 일어난 가장 야만적인 학살사건 중 하나로 기록되고 있다.
1996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