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혜준 ()

근대사
인물
일제강점기 때, 평안남도 대동군 금제면 원장리와 강서군 반석면 상사리 사천시장 일대의 독립만세시위에 참여했다가 체포되어 순국한 독립운동가.
인물/근현대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888년
사망 연도
1929년 7월 10일
출생지
평안남도 강서
대표 상훈
건국훈장 애국장
•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통해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내용 요약

이혜준은 일제강점기, 평안남도 강서군 반석면 상사리 사천마을의 3 · 1운동을 주도한 독립운동가이다. 1919년 3월 4일 강서군 반석면 상사리 사천마을에서 일어난 만세시위를 주도하였다. 3월 2일 만세시위로 검거된 사람들을 구출하기 위해 3월 4일 사천시장에 모여 사천 헌병주재소로 향하다가 일제 헌병과 충돌하여 많은 사상자가 발생하였다. 격렬한 시위 끝에 일제 군경에 체포되어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르다가 1929년 7월 10일 옥중에서 순국하였다.

정의
일제강점기 때, 평안남도 대동군 금제면 원장리와 강서군 반석면 상사리 사천시장 일대의 독립만세시위에 참여했다가 체포되어 순국한 독립운동가.
인적 사항

평안남도 강서군 성태면 연곡리 출신으로, 1888년 태어났고 1929년 7월 10일 옥중에서 순국하였다.

주요 활동

1919년 3월 2일 평안남도 강서군 반석면 상사리에 있는 반석교회(盤石敎會) 교인들이 중심이 되어 만세시위를 진행하였는데, 여기에서 많은 사람들이 검거되었다. 이들을 구출하기 위하여 반석교회 장로 최능현(崔能賢)과 사천시장교회(沙川市場敎會) 목사 송현근(宋賢根)이 중심이 되어 3월 4일 새로운 시위대를 조직하였다.

여기에는 강서군 반석면과 대동면, 금제면 등의 인근 교회 교인들이 연대하여 참가한 것으로 보인다. 강서군 성태면 출신의 이혜준(李兮俊)이 참가한 것은 이 때문이었을 것이다.

마침 장날이었던 3월 4일 아침 9시경, 대동군 금제면 원장리를 출발한 시위대는 강서군 반석면 상사리 사천시장으로 향하였다. 이 행렬에 참가한 사람은 5,000~8,000명에 달했는데, 11시경 사천시장 입구에 잠복하고 있던 사천 헌병주재소의 헌병과 헌병 보조원의 무차별 총격에 의해 다수의 사상자가 발생하였다.

오후 1시경 총탄을 소진한 헌병 주재소원 4명은 군중의 공격을 받아 전부 사망하였고, 숙소도 전소되었다.

오후 5시경 강서 파병대에서 보병이 파견되어 시위를 진압하였다. 일제 군경은 이 과정에서 시위대 측 사망자 12명, 부상자 8명이 발생하였다고 보고하였다. 그러나 시위에 참가하였던 사람들은 사상자가 60여 명에 달한다고 증언하였다.

1919년 12월 6일 고등법원에서 살인, 방화, 소요죄 및 「보안법」 위반 혐의로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11여 년 가까이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다가 1929년 7월 10일 옥중에서 순국하였다.

상훈과 추모

2010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참고문헌

단행본

『독립유공자공훈록』 17(국가보훈처, 2009)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 2 (국가보훈처, 1971)
이용락, 『3 · 1운동실록』(삼일동지회, 1969)

신문 · 잡지

『매일신보』(1919. 12. 5.)

판결문

「판결문」(고등법원, 1919. 12. 6.)

인터넷 자료

공훈전자사료관(http://e-gonghun.mpva.g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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