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명 모락장유혈투쟁〔沙川場市流血鬪爭〕이라고도 한다. 독립 만세 운동이 강서군 반석면에서 전개되었지만, 발단은 대동군 금제면 원장리에서부터 시작되었다.
2개 군 사이에 위치한 모락장은 장날에는 서로 내왕이 빈번하였고, 두 곳에 모두 장로교파 교회가 있었다. 1919년 3월 1일원장리와 모락장 중간지점에 있던 반석면의 반석교회(盤石敎會) 장로 조진탁(曺振鐸)은 평양의 3·1운동에 직접 참가하고 독립선언서 몇 장을 가지고 돌아왔다.
그는 돌아오는 길에 원장리에 들러 그곳 교회 지도자 윤상열(尹相悅)·고지형(高志亨)·차현구(車玄九) 등을 만나 반석·원장 두 교회 합동으로, 3월 4일 원장리 장날을 이용하여 독립 만세 운동을 전개하기로 합의하였다.
한편, 반석교회 장로 최능현(崔能賢)은 모락장교회 목사 송현근(宋賢根)에게도 이 사실을 알렸다. 소식을 들은 송현근은 김해진(金海鎭)의 집에 교회 간부를 소집하여 거사를 준비하였다. 그런데 헌병 보조원에게 발각되어 김해진을 비롯한 10여 명이 검거되고, 송현근은 반석교회 조진탁의 집으로 피신하는 상황이 발생하였다.
그러나 3월 4일 오전 10시원장리에서는 계획대로 독립 만세 운동이 진행되었다. 이 때 최능현과 송현근은 모락장의 시위 운동은 사전에 발각되어 계획이 좌절되었음을 알렸다. 그리고 그들은 지금 동지들이 헌병대 유치장 안에 갇혀 있으니 구출하자고 호소하였다.
이런 사실을 알게 된 군중은 반석면 상사리를 향해 시위 행진을 하였다. 그러나 모락장에 거의 도착해서 고갯길을 막 넘으려는 참에, 주변 숲속에서 이들을 기다리고 있던 일본군이 총격을 가하여 앞서 가던 청년들이 하나 둘씩 쓰러졌다. 이 때 우리측에서 순국한 사람은 13명이었고, 중경상자는 40여 명에 달하였다.
이에 격분한 군중은 돌과 맨주먹으로 일본군에 대항하자, 모락장은 삽시간에 전쟁터를 방불케 하였다. 이에 형세가 불리하다고 생각한 헌병주재소장 사토(佐藤)와 헌병 보조원 2명은 달아나고 말았다.
그러나 시위 군중은 달아나는 그들을 쫓아가 살해하였지만, 사토의 아내와 어린애는 약한 아녀자라 하여 살려주었다. 그런데 사토 아내는 즉시 강서에 있는 평양헌병대 본부로 달려가 이런 사실을 알렸다.
이에 일본 헌병대는 즉시 현장으로 출동하여, 400명을 검거하여, 20일간 고문한 끝에 대부분 증거 불충분으로 석방하였으나, 49명은 평양 검사국에 송치하였다. 이곳의 3·1운동은 경기도 수원군 향남면 제암리 참변과 함께 대표적인 유혈 참극의 하나였다. →강서삼일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