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흥돌은 일제강점기, 경기도 김포군 고촌면 신곡리의 3 · 1 만세시위를 주도한 독립운동가이다. 1919년 3월 김포군 고촌면 신곡리 만세시위를 주도하였다. 3월 24일 마을 주민과 함께 동리 뒷산에 올라 독립만세를 외치고 시위를 하였다. 3월 25일에는 태극기를 만들고 마을 주민을 모아 독립만세를 외치며 마을 안을 시위 행진하였다. 이틀 동안의 시위를 주도하다가 체포되어 징역 6월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으며, 출옥 후 1920년 2월 10일 옥고 후유증으로 순국하였다.
경기도 김포군 고촌면 신곡리 출신으로, 1888년 2월 10일 태어났다. 3 · 1운동 당시 농업에 종사하였다. 1920년 2월 10일 옥고 후유증으로 사망하였다.
3 · 1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되고 있던 1919년 3월 24일, 경기도 김포군 고촌면 신곡리에서는 마을 주민 50여 명이 동리 뒷산에 올라 독립만세를 외치는 시위를 단행하였다. 이 산상 시위는 김정국(金正國) · 윤재영(尹在英) 등이 주도하였고, 많은 마을 주민들이 참가하였다.
경기도는 산상 시위 혹은 산상 횃불시위 등이 가장 많이 일어났던 곳이다. 김포군 고촌면의 시위도 경기도의 이런 시위 상황을 반영한 것이었다.
이튿날인 3월 25일 학생 김정의(金正義)와 농민 김남산(金南山), 이흥돌(李興乭)이 김정의의 집에서 태극기 2개를 만들고, 주민 50여 명을 이상윤(李上允)의 집 앞뜰로 모았다. 김정의 · 김남산 · 이흥돌은 선두에서 깃발을 들고 “조선독립만세”를 외치며 마을 안을 순회 행진하며 시위하였다.
이틀 동안의 산상 시위와 마을 안 만세시위를 주도한 이흥돌은 곧바로 체포되었다. 같은 해 5월 22일 경성지방법원에서 「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6월을 선고받고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1920년 2월 10일 옥고 후유증으로 순국하였다.
2015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