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도교 중진 중의 한 사람인 김진팔(金鎭八)이 서울에서 열린 49일 기도회에 참석하였다가, 독립운동에 관한 밀령을 받고 내려와서 정주교구장 최석일(崔晳一) · 서인화(徐仁和) · 백중빈(白重彬) · 이근배(李根培) · 박윤길(朴允吉), 곽산교구장 김경함(金庚咸) 등과 서주동 박형석(朴瀅錫)의 집에서 만나, 1919년 3월 31일 정주장날을 이용, 독립만세 시위를 전개하기로 결의하였다.
이때 군민동원의 책임을 맡은 김석보(金碩甫)가 서면과 해산면을 돌아 읍내로 귀환하던 중, 헌병보조원의 검문에 솜바지 속에 숨겨 두었던 독립선언서 1장이 발각되었다. 그리하여 31일의 만세운동은 처음부터 살벌한 분위기 속에서 전개되었다.
이 날 만세운동에 참가한 시위군중은 무려 2만 5,000명이나 되었다. 이 때 출동한 일본 헌병에 의해 선두에서 태극기를 들고 군중을 독려하던 최석일이 두 팔과 목이 잘려 숨지자, 뒤따라 행진하던 김사걸(金士傑)이 그가 떨어뜨린 태극기를 주어 들고 앞장서 나갔다.
이때 헌병보조원들은 시위 군중을 쇠갈고리로 찌르고 일본경찰은 계속하여 총을 난사하였다. 그 결과 현장에서 순국한 사람이 92명, 검거된 사람만도 70여 명에 달하였다. 그래서 이곳의 독립만세운동은 전국의 3·1운동 중에서 인명피해가 가장 컸던 대학살사건으로 기록되었다.
또, 이날 오산학교(五山學校)가 있는 용동에서도 별도의 만세시위운동이 전개되었다. 그 뒤 일본군은 3월 31일의 만세운동과 민족대표로 서울로 올라간 오산학교 설립자 이승훈(李昇薰)에 대한 보복으로, 4월 2일 밤 천도교 정주교구 · 오산학교와 기숙사 · 용동교회 등을 모두 불태우는 한편, 4월 10일에는 읍내 기독교회당에도 방화하였다.
이처럼 정주군에서는 18회의 거사에 참가한 인원은 약 5만 5,000명, 사망자 120명, 부상자 525명, 피검자 567명을 낸 전국에서 가장 격렬한 만세운동이 전개된 지역 중 하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