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조가 『송사(宋史)』를 저본으로 하면서 그 오류와 문제점을 수정·보완하고 번잡한 내용들을 산삭(刪削)하며 체재를 정비하여 편찬한 송나라의 역사서이다.
1343년(元 至正 3)에 편찬된 『송사』는 일찍부터 정통론(正統論)의 관점에서 하자(瑕疵)가 지적되었고, 또 촉박한 편찬 기간에서 비롯된 수많은 오류와 중복 서술 때문에 중국의 역대 정사(正史) 중에서 가장 혹평을 받았던 역사서이다. 정조 역시 세손 시절 『송사』를 공부하면서 그 체재와 내용에 많은 불만을 갖게 되었다. 결국 정조는 직접 『송사』를 개수(改修)하기로 결심하고, 『송사』의 편목(編目)을 정리하고 필삭(筆削)을 가하는 작업을 진행하여 즉위 전에 약 80권의 초고를 완성하였다.
즉위 후에 정조는 자신의 초고를 세손 시절의 측근 학자 10여 명에게 주어 개정하게 한 다음, 개정된 원고를 서명응(徐命膺)에게 주어 수정하도록 했다. 그 결과 1780년(정조 4)에 100권 40책의 『송사전』이 편찬됐지만, 정조는 그 내용에 만족하지 못하고 이를 이덕무(李德懋)에게 주어 다시 개정하도록 했다. 이덕무는 정조와의 긴밀한 협의 속에 수정 작업을 진행했고, 결국 1791년에 최종적으로 150권 61책의 『송사전』을 완성하였다.
61책. 필사본. 권수(卷首)·목록(目錄)·본문(148권)으로 구성되어 있다. 책 크기는 세로 33㎝, 가로 21.7㎝이고, 반엽(半葉)의 광곽(匡郭) 크기는 세로 23.1㎝, 가로 16.1㎝이다. 본문의 행자수는 10행(行) 20자(字)이고, 판심(版心)은 상흑어미(上黑魚尾)로 되어 있다.
본서는 기전체(紀傳體)의 형식을 따르고 있다. 제1책의 권수(卷首)에는 「어정송사전전(御定宋史筌箋)」(서명응 찬), 「어정송사전서(御定宋史筌序)」(서명응·황경원 찬), 「어정규사전의례(御定奎史筌義例)」, 「의례보(義例補)」 등이 실려 있어 본서의 편찬 과정 및 서술 원칙 등을 확인할 수 있다. 제2책에는 전체의 목차인 「목록(目錄)」이 수록되어 있다. 제3~61책의 본문(148권)은 「본기(本紀)」 8권, 「지(志)」 47권, 「세가(世家)」 2권, 「열전(列傳)」 91권으로 구성되어 있다.
『송사전』은 저본이 된 『송사』와 비교했을 때 체재와 내용에서 뚜렷한 특징을 보인다. 먼저 체재 상의 특징으로는 『송사』에서 「열전」에 포함시켰던 후비(后妃)를 「본기」로 편입시킨 점, 「종실세가(宗室世家)」를 별도로 설정한 점, 성리학을 정립한 주돈이(周敦頤)·장재(張載)·정호(程顥)·정이(程頤)·주희(朱熹)를 「오현전(五賢傳)」으로 독립시킨 것, 『송사』에 없는 「유민전(遺民傳)」을 새로 설정한 것, 「외국열전(外國烈傳)」을 재구성하여 고려를 가장 앞에 두고 『고려사(高麗史)』를 기준으로 내용을 수정했으며 요(遼)·금(金)·몽고(蒙古)도 여기에 포함시킨 것 등을 들 수 있다.
내용면에서는 송나라의 멸망 시기를 1276년을 잡은 『송사』와는 달리, 1279년에 멸망한 것으로 규정하고 1276~1279년에 송나라의 잔존세력에 의해 옹립된 황제들을 정통으로 인정하였다. 또, 『송사』의 가장 큰 문제점이 ‘번잡과 중복’이었으므로 전체적으로 내용을 축약·서술하고 중복된 부분들은 삭제했으며, 오류 및 누락된 부분들도 수정·보완하였다. 또, 서법(書法)과 용어 등도 일정한 기준으로 통일하여 일관된 체계를 갖추도록 하였다.
정조가 초고를 직접 작성했고, 이후 개정 과정에서도 정조가 직접 원고를 검토하고 재가했다는 점에서 본서는 정조의 사관(史觀)이 투영된 역사서라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