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안남도 강서군 동진면에서 부친 정용훈과 모친 강주훈의 3남 1녀 중 막내로 출생했다. 아명은 정영도, 미국명은 로버트 정(Robert Chung)이다. 도산 안창호의 개인비서를 했고, 미국에서 유학 후 귀국한 뒤 1930년대에 한국의 대표적인 부흥사로 활동했다. 해방 후 한국에 나사렛교회(현 나사렛성결교회)를 설립했다.
정남수는 일찍이 기독교를 받아들인 외가의 영향으로 어려서부터 신자가 되었고, 같은 동향 민족운동가인 안창호를 만나 1908년 그가 세운 대성학교에서 수학하였다. 안창호가 일본 경찰에게 체포되어 구금되자 정남수가 그의 옥바라지를 했다고 한다. 안창호가 망명하는 것을 도와 함께 미국에 간 뒤에도 그와 계속 관계를 가졌고, 1913년 흥사단이 미국에서 처음 만들어졌을 때 창립멤버로 활동했다.
그 후 켄터키에 있는 애즈베리 대학(Asbury College)과 신학대학원에서 공부하였다. 이 기간 동안에 남감리교 목사가 되었으며, 이곳의 학장이자 유명한 부흥사였던 모리슨(Henry Morrison)의 도움으로 성결 부흥운동에 가담하였다.
미국 성결운동으로부터 지원을 약속받은 정남수는 1926년 귀국하여 전국의 교회를 순회하며 부흥집회를 인도하다가, 1931년부터 이미 한국에서 활동하던 성결단체인 동양선교회 성결교회에 가입하여 동 단체의 이사가 되는 한편, 장막전도대장으로 임명되었다. 장막전도대는 당시 미국에서 유행하는 부흥집회 방법을 받아들여 트럭으로 전국을 순회하며, 음악을 통해 대중들에게 접근하여 야외의 장막에서 집회를 인도하는 활동을 했던 단체이다. 그리하여 정남수는 “한국의 빌리 선데이”라는 별명을 얻기도 하였다. 이 장막전도대의 활동으로 1930년대 도시에서 많은 성결교회가 설립되었다. 1935년부터는 『성화』라는 월간 잡지를 발행하여 문서전도에도 힘썼다.
1935년 말 정남수는 동양선교회와의 갈등으로 성결교회를 탈퇴하였고, 다시 감리교회에 가입하였다. 그 후 독자적으로 장막전도대를 통한 부흥집회와 『성화』의 발간을 계속하였다.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일제는 민족주의자를 탄압하기 위해서 수양동우회사건을 만들었는데, 안창호와 가까웠던 정남수도 여기에 연루되어 고통을 받았다. 또한미국에서 활동했던 정남수는 일제로부터 친미파로 몰려 옥고를 치루기도 하였다. 1940년부터 장막전도대의 운영이 중지되고, 1942년부터 『성화』의 발행이 중지되자 그는 서울을 떠나 시골에서 은거하였다.
해방 후, 과거 성결교회에서 함께 사역했던 사람들이 그에게 미국의 성결단체와 연결해 줄 것을 요청하였고, 정남수는 다시 미국으로 가서 한국 목사들의 뜻을 전달하였다. 그 결과 미국 성결교파 가운데 하나인 나사렛교회와 연결되었고, 1948년 이 교파의 감독 니스(O. J. Nease)가 내한하여 공식적으로 한국 나사렛교회를 시작하고, 정남수를 한국책임자로 임명하였다. 한국전쟁 중에는 그가 미국에서 한국교회를 위해서 모금활동을 하였다. 그러나 전쟁 후 1954년 미국 나사렛교회가 오웬스(Donald D. Owens)를 초대 한국선교사로 파송하자, 정남수는 다시 미국으로 갔고 1956년에 별세하였다. 한국나사렛성결교회(나사렛교회)는 정남수를 창립자로 기념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