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결교회의 목사로서 한국성결교회의 사부(師父)라고 불린다. 한국 복음주의 운동의 주요 지도자이다. 동양선교회와 협력하여 한국성결교회를 발전시킨 성결교회의 가장 대표적인 인물이다. 서울신학대학 초대학장, 조선야소교동양선교회성결교회 제1회 총회장, 『활천』의 편집인 등을 역임하며, 한국성결교회의 행정, 신학, 문서 활동을 이끌었다.
1890년 서울에서 출생하여 YMCA에서 공부하였고, 일본에 가서 당시 동경 한인 YMCA의 총무였던 김정식의 안내로 동경성서학원에 입학했다. 1911년 졸업 후 귀국하여 개성에서 사역하다가, 1914년에 동양선교회 복음전도관(후에 성결교회) 첫 번째 안수식에서 목사 안수를 받았다. 그 후 충청남도 규암에서 시무하다가, 1916년 동양선교회가 세운 성서학원 교수 겸 ‘아현복음전도관’의 주임이 되었다.
이명직 목사가 성결교회의 중심인물로 부각된 이유는 1921년 가을 성서학원에서 일어난 부흥운동 때문이었다. 그는 성서학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한편, 전국을 돌아다니면서 부흥회를 인도했다.
1920년대 이명직은 성결교회의 부흥운동을 주도하면서 다양한 방면에서 활동했다. 먼저 동양선교회의 고문, 그 다음에는 이사로서 교단의 실질적인 행정을 이끌었고, 1929년 한인으로서는 유일하게 동양선교회 재단이사가 되었다. 동시에 성서학원에서 가르치면서 성결교회의 신학 정립에 노력하였으며,「아가서 강해」와 같은 활발한 저술 활동을 했다. 그는 1924년 성결교회의 유일한 기관지인 『활천』을 창간했는데, 이것은 지금까지도 간행되고 있다. 『활천』은 한국기독교에서 가장 오랫동안 간행되고 있는 잡지로 인정받고 있다.
1930년에 들어서면서 동양선교회가 한국 교회를 한국인에게 넘겨주려는 계획에 따라서 이명직이 적임자로 결정되었다. 그는 1929년 제2회 연회장, 1933년 제1회 총회장으로 선출되었고, 1930년에 성서학원 원장이 되었다. 이 시기에 성결교회는 크게 성장하여 장로교, 감리교 다음의 제3교단이 되었다. 1936년 일부 성결교회의 목회자들이 자립·자치문제로 동양선교회와 마찰을 빚고 교단을 떠났지만 이명직은 동양선교회와 함께 성결교회에 남았다.
1940년 성서학원이 전문학교에 준하는 경성신학교로 인가를 받게 되자 그는 초대교장이 되었고, 1940년 태평양전쟁으로 미국 선교사들이 철수하자 교단의 실질적인 권한을 갖고 있는 이사장과 교단의 재산을 관리하는 재단이사장에 취임하였다.
그는 신사참배는 단지 국민의례라는 총독부의 입장을 받아들였기 때문에 친일파라는 비판을 받기도 하였으나, 실제로는 그리스도의 재림신앙을 고수해서 일본의 천황제와 마찰을 빚었다. 또한 한국성결교회를 일본성결교회에 편입시키는데 반대하였고, 기독교의 경전에서 구약성경을 삭제하라는 총독부의 지시를 거부했다. 결국 1943년 5월 24일 이명직을 비롯한 성결교회 교직자들이 총 검거되었고, 12월 28일 성결교회는 해산되었다.
해방 이후 이명직은 모든 교단의 공직에서 물러나 신학 강의에 전념하다가 6·25전쟁 때 교단의 주요 인물들이 납북당하여 지도자의 공백이 생기자 다시 교단 행정 일선에 복귀하여 1950년대의 성결교회를 이끌었다. 1959년 서울신학교가 서울신학대학으로 승격하자 초대 학장이 되었다. 1950년대 말 한국기독교협의회(NCC)와 사회사업문제로 1961년 예수교대한성결교회가 창립되었다. 하지만 1965년에 다시 합동운동을 주도하여 양 교단을 통합시켰고, 서울신학대학의 명예학장으로 추대되어 성결교회의 최고 지도자로서 활동하다가 1974년에 별세하였다.
한국복음주의 동지회(NAE)는 이명직 목사를 고문으로 추대하였고, 미국 아주사(Azusa)대학은 그에게 1958년 명예박사학위를 수여하였다. 현재 한국성결교회에는 이명직목사기념사업회가 그를 기리는 사업을 진행하고 있고, 서울신학대학교는 개교 100주년을 맞이하여 『이명직 전집』16권을 간행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