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7년 대부흥운동은 1900년대 한국 교회에서 일어난 대표적인 부흥운동이다. 평양 대부흥운동, 한국의 오순절이라고도 한다. 1903년 원산에서 하디 선교사가 중심이 된 성경 공부 모임이 시작되었다. 성경 공부를 하던 하디는 돌연 각성하여 자기죄를 회개하기 시작하였다. 하디가 시작한 부흥운동은 1905년 발족한 한국복음주의선교회연합공의회에 의해 전국적으로 확대되었다. 1906년 1월부터 전국적으로 교파를 초월하여 연합부흥회를 개최하였다. 1907년 1월 장대현교회의 연합사경회에서 길선주가 회개한 후에 전국을 순회하는 부흥사가 되었다.
1907년 대부흥운동은 20세기 초 불안한 국제정세 가운데 일어났다. 중국을 중심으로 하는 중화질서는 무너졌고, 러시아는 남하하고 있었으며, 일본은 조선 침략의 야욕을 불태우고 있었다. 하지만 한국 정부는 무능하고, 부패해서 백성들을 보호할 수 없었고, 이러한 상황에서 많은 한국인들은 불안함을 달래기 위해서 기독교를 찾기 시작하였다.
한편 한국에서 사역하던 선교사들은 비록 많은 신자들이 교회에 모이지만 그것은 신앙이 아닌 정치적인 동기에서 교회로 오고 있다고 보았고, 이에 이들을 진정한 신자로 만드는 것이 급선무라고 판단했다. 당시 영미 기독교에서는 강력한 부흥운동이 일어났고, 많은 부흥사들이 한국을 방문하였는데, 1907년 대부흥운동은 이러한 국제적, 국내적 요소들이 결합하여 일어난 사건이었다.
1907년 대부흥운동은 1903년 여름 여자 선교사들이 중심이 된 원산의 조그만 성경공부 모임에서 시작되었다. 이 모임의 강사는 하디였는데, 그는 당시 한국 교회의 영적 상태에 대해서 걱정하고 있었다. 하지만 성경공부를 인도하는 가운데 하디는 오히려 하나님이 원하는 것은 한국인들의 각성이 아니라 자신의 각성이라는 것을 깨닫고, 한국인 신자들 앞에서 자신의 잘못을 자백하였다. 이것이 도화선이 되어 한국 신자들도 자신의 잘못을 자백하였다.
동년 10월 미국의 유명한 부흥사 프란손(F. Franson)이 원산을 방문하여 집회를 열었고, 하디에게 대중적인 부흥회를 인도하는 법을 알려 주었다. 그 후 하디는 1903년 말부터 1904년 말까지 송도, 서울, 제물포, 평양에서 집회를 인도하였다.
하디가 시작한 부흥운동이 전국적으로 확대된 것은 1905년 9월에 만들어진 한국 최초의 기독교 연합기관인 한국복음주의선교회연합공의회 때문이었다. 당시 한국의 대표적인 선교단체들이 총 망라된 이 모임은 하디로부터 시작된 부흥운동을 보다 조직적으로 확대시키기로 결정하였다.
을사늑약으로 민심이 흉융할 당시 선교사들은 신앙으로 이 어려움을 극복하며, 동시에 한국인들의 형식적인 신앙을 실질적인 신앙으로 바꾸는 계기를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1906년 1월부터 전국적으로 교파를 초월하여 연합부흥회를 개최하였다.이제 초기에 남감리교를 중심으로 시작되었던 부흥운동이 전국에 있는 교회로 확산된 것이다.
1906년 9월 부흥사인 존스톤(H. A. Johnston)이 한국을 방문하였다. 그는 당시 세계적으로 일어나고 있던 성령운동을 설명하면서 이 같은 운동이 한국 교회에도 일어나기를 바란다고 발언했다. 이런 존스톤의 언급에 평양의 선교사들과 한국인 지도자들은 감흥을 받았고, 1907년 1월 장대현교회에서 열린 연합사경회에서 놀라운 부흥의 역사가 일어났다. 이 부흥회는 길선주의 회개로 촉발되었으며, 신자들의 참회와 자백으로 이어졌다. 이후 길선주는 전국적으로 순회하는 부흥사가 되었다.
1907년 대부흥운동의 주요 특징은 첫째, 성경을 공부하는 사경회 가운데 일어났으며, 둘째, 성령의 임재와 함께 철저한 회개가 뒤따랐고, 셋째, 처음에는 선교사가 주도했으나, 나중에는 한국인이 주도했으며, 넷째, 이 부흥회의 결과로 한국 교회에 뜻 깊은 도덕적 갱신이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1907년 대부흥운동이 한국기독교를 정착시킨 중요한 사건이라는 데에 대부분 동의하지만 일부에서는 이 부흥운동이 한국기독교가 지나치게 민족운동에 개입하는 것을 막기 위한 선교사들의 정책에서 나온 것이라는 평가가 있다. 하지만 이런 해석은 결과론적인 해석으로 종교적인 사건을 정치적으로 해석하는 것이라는 반론도 제기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