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창 봉덕리 고분군 ( )

선사문화
유적
국가유산
마한 분구묘 전통을 가진 백제시대 분구묘.
유적/고인돌·고분·능묘
양식
분구묘
건립 시기
삼국시대
소재지
전라북도 고창군
국가문화유산
지정 명칭
고창 봉덕리 고분군(高敞 鳳德里 古墳群)
분류
유적건조물/무덤/무덤/분구묘
지정기관
국가유산청
종목
사적(2015년 09월 24일 지정)
소재지
전라북도 고창군 아산면 봉덕리 산 47
•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통해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내용 요약

고창 봉덕리 고분군은 마한 분구묘 전통을 가진 백제시대 분구묘이다. 2호분을 제외한 3기의 고분은 평면 장방형에 분정부가 편평한 방대형을 띠며, 장변의 길이가 60m 이상, 높이 5m 내외의 대형 규모이다. 1호분 발굴조사 결과, 총 5기의 석축묘와 2기의 옹관묘가 확인되었고, 4호 석실에서는 금동신발을 비롯한 최상급 위세품이 출토되었다. 전라북도 고창군 아산면 봉덕리에 있으며, 2015년 9월 24일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정의
마한 분구묘 전통을 가진 백제시대 분구묘.
발굴경위 및 결과

봉덕리 고분군 중 1 · 2호분은 앞에서 볼 때, 두 동산이 나란하게 서 있는 모습과 같아 예로부터 ‘쌍나발등’으로 불렸으며, 1990년 전북대학교박물관에서 고창군 아산면 일원의 지표조사를 진행하는 과정 중 1 · 2호분을 고분으로 인지하고 학술 보고하였다.

1997년 원광대학교 마한 · 백제문화연구소에서 고창 일원의 정밀지표조사를 통해 주변 일원에서 봉덕리 3 · 4호분을 새롭게 확인하였고, 봉덕리 1~4호분의 분구(墳丘)를 측량하였다. 봉덕리 고분군의 명확한 실체를 확인하기 위해 2008년 · 2009년 원광대학교 마한 · 백제문화연구소에서 봉덕리 1호분의 발굴조사를 진행하여 고분의 성격 및 세부양상을 확인하였고, 총 7기의 매장시설과 주구를 조사하였다.

이 중 1호분 4호 석실 내에서는 금동신발을 비롯한 최상위 위세품이 출토되었고, 이를 토대로 2015년 봉덕리 1 · 2호분은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2019년에는 사적 지정 범위 확대를 위한 기초자료 확보의 일환으로 봉덕리 3 · 4호분에 대해 시굴조사를 진행하여 인위적인 성토가 이루어진 고분임이 확인되었다.

형태와 특징

해발 110.4m의 태봉산으로부터 이어지는 여러 갈래의 구릉 줄기 중 상복 · 중복마을의 북서편에 형성되어 있는 구릉으로서 북동 방향으로 길게 뻗은 능선의 정상부에 3 · 4호분, 말단부에 1 · 2호분이 약 150m 거리를 두고 조성되어 있다. 이 중 1 · 2호분은 구릉의 북동쪽 끝자락에 나란히 위치하는데, 가장 북쪽 끝에 위치하는 것이 1호분, 바로 옆이 2호분이다. 배치 양상을 보면, 1호분이 2호분에 비해 앞으로 돌출되어 있다.

봉덕리 고분군 중 1~3호는 평면 형태가 장방형이며, 분정부가 평탄한 방대형을 이룬다. 4호분은 타원형에 가까운 분형을 띠고 있다. 전면 발굴조사가 이루어진 1호분을 중심으로 보면, 규모는 동-서 63m, 남-북 52m, 높이 5m 내외이며, 2호분과 3호분은 1호분보다 큰 규모로 판단된다. 1호분의 축조는 자연구릉을 굴착하여 1 · 2호분으로 분리하고 분리된 1호분의 네 사면을 깎아 다듬고 그 안쪽 대지 조성된 부분에 성토하여 현재의 모습과 같은 방대형의 고분을 축조한 독특한 축조 양상이다.

봉덕리 1호분의 매장시설로는 분구 내에서 석축묘 5기, 옹관묘 2기 등 총 7기의 매장시설이 확인되면서 다장 요소를 갖추고 있다. 분구사면과 남쪽 주구 내 통일신라시대로 추정되는 후대의 소형 석곽 9기가 조사되었다. 석축묘는 1 · 3 · 5호의 3기는 횡혈식 석실, 4호는 수혈식 석실, 2호는 일부 석축시설은 확인하였으나 대부분 유실되어 정확한 형태는 파악하기 어렵다.

분정부 중앙에 위치한 3호 석실을 기준으로 동쪽부에만 매장시설이 배치되고 있으며, 서로 중복되지 않고 10m 이내의 간격을 두고 있다. 옹관묘 2기는 분정부의 북서쪽 공간에 시설되며, 석실묘와는 일정한 거리를 두고 위치하고 있으며, 주변을 공터로 남겨놓았던 점은 옹관묘와 석실묘는 계획적인 배치에 의해 다른 공간에 축조된 것으로 파악된다.

분정부의 중앙에 위치하는 5호 석실을 중심으로 처음 1호분이 조성되었으며, 5호석실이 조성된 후 동쪽부의 빈 공간을 수직 확장하여 추가로 석실묘가 축조된 것으로 파악된다. 석실묘의 축조 순서를 살펴보면, 5호석실-1호 · 4호석실-3호석실-2호석실 순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1호석실과 4호석실, 3호석실과 2호석실 간의 축조 선후관계는 명확하지 않다.

봉덕리 1호분은 가장 먼저 축조된 5호 석실을 중심으로 성토 및 축조가 이루어졌다가 이후 추가적으로 1호 · 4호 석실이 빈 공간을 이용해 축조되었다. 또한, 5호 석실이 폐쇄된 이후에 3호 석실이 5호 석실 바로 앞부분에 축조되었다. 1호 · 3호 · 4호 · 5호 석실은 주변으로 굴광선이 확인되지 않는 점과 토층양상으로 볼 때, 성토와 벽석의 축조가 동시에 이루어졌던 것으로 판단된다.

4호 석실을 제외하고 모두 도굴 및 훼손된 상태로 거의 유물이 잔존하지 않았지만, 5호 석실 바닥에서는 능형의 투조된 금동신발의 바닥편 일부가 확인되었고 금박된 대금구편, 철부, 직구호, 2단 투창고배 및 뚜껑 등이 출토되었다. 또한, 5호 석실 퇴적토 내에서는 다량의 와형토제품이 함몰된 채로 출토되었다. 3호 석실에서는 금동이식, 연화문이 새겨진 중국제 청자편이 출토되었고, 1호 석실 내에서도 금동이식과 금제장식편, 발형기대 등이 확인되었다.

4호 석실은 도굴되지 않아 매장 당시 상황 그대로 유물이 출토된 매우 중요한 자료이다. 피장자의 발치 쪽에는 금동신발이 쓰러진 채로 확인되었고, 신발 내에서는 인골편이 확인되어 매장 당시 금동신발을 착장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 밑으로는 다량의 개배류가 놓여 있었다. 오른편에는 은제장식대도와 철제대검이 나란히 위치하고 그 주변으로 소호장식유공호 및 기대세트는 옆으로 뉘인 채로 그 아래에는 동제탁잔이 출토되었다. 그리고 피장자의 머리 쪽에는 은제관식과 영락장식, 금제이식 2쌍 그리고 다량의 구슬이 출토되었다. 또한, 석실의 남동모서리 벽가에는 단경호와 중국제 청자반구호가 출토되었다.

1호분의 주구는 조사를 진행하지 못한 동쪽을 제외하고 서 · 남 · 북쪽에서 모두 주구가 확인되었다. 북쪽과 서쪽 주구는 서로 연결되지 않지만, 주변 일대의 삭평으로 끊어졌을 가능성이 있으며, 남쪽과 서쪽 주구는 서로 연결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중 서쪽 주구는 북쪽에서부터 점차 넓어지다 중앙이 급격히 넓어지는 형태를 띠며, 폭이 넓은 곳은 최대 8m 정도, 깊은 지점은 1m 정도이다.

대호 2~3개체를 비롯하여 다양한 유물들이 중앙부를 중심으로 다량 확인되었다. 바닥층과 퇴적층에도 유물이 출토되는 점으로 보아 여러 차례 훼기 행위가 이루어졌던 것으로 보이며, 출토된 발형기대의 경우 대각 부분은 주구 내에서 발 부분은 분정부에서 출토되고 있어 제의행위가 이루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고분군의 조성시기는 전면 발굴조사가 이루어진 1호분을 중심으로 볼 때, 5세기 초 · 중엽에 5호 석실을 위한 고분의 축조가 이루어지고 이후 주변으로 석실이 추가되면서 6세기 전반까지 지속되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의의 및 평가

고창 봉덕리 고분군은 5세기 이후에 조성된 마한 분구묘의 전통을 가진 대형 고분군이다. 영산강 유역을 비롯한 대형 고분 중에는 가장 북쪽에 위치하고 있다. 그 규모와 최상급 위세품으로 볼 때, 고창 지역을 아우르는 강력한 재지세력의 수장층 무덤으로 볼 수 있으며, 출토된 유물을 토대로 백제와의 관계 및 중국, 일본, 가야 등과의 교류를 파악할 수 있는 매우 중요한 자료로 평가된다.

참고문헌

단행본

『고창 봉덕리 1호분-본문-』(원광대학교 마한 · 백제 문화연구소 · 고창군,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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