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화는 원래의 봉안처를 떠난 후 장황과 화기가 소실되어 제작 연대와 제작 화승에 대한 정보를 확인할 수 없다. 그러나 함께 조성된 시왕도 네 폭 중 한 폭(동국대학교 박물관)을 통해 이 불화에 대한 정보를 준다. 이에 의하면 「봉은사 시왕도」는 "건륭(乾隆) 42년인 1777년(정조 1)에 광주(廣州) 수도산(修道山) 봉은사(奉恩寺)에서 삼장탱(三藏幀), 시왕 각부탱(十王各部幀), 사자탱(使者幀)을 조성하였다."고 기록되어 제작 연대와 봉안처에 대한 실마리를 제공하고 있다.
6, 8, 10대왕도 화기에는 불화를 그린 승려 이름도 기록되어 있는데 용안(龍眼), 진경(震潁) 이하 청숙(淸肅), 편수(片手) 수밀(守密), 한계(漢戒), 영인(永印), 상훈(尙訓), 협력(頰平), 축□(笁□), 인종(印宗), 축헌(笁軒), 도준(道俊), 환봉(喚奉), 연홍(演泓), 저인(定印) 으로 기록되었다. 그러므로 네 폭 시왕도는 수화승(首畫僧)인 진경 등과 여러 화승들에 의해 제작한 불화임을 알 수 있다.
화면 크기는 세로 114.8㎝, 가로 148.3㎝이며, 화면은 크게 심판을 하는 시왕을 상단에, 지옥 장면을 하단에 배치하였다. 이 사이를 구름을 그려 상단과 하단으로 구획하고 있다. 상단에는 병풍을 배경으로 용두(龍頭)로 장식된 의자에 앉은 시왕이 판관의 보고를 받으며 심판하는 장면을 그렸다. 시왕은 일(日), 월(月)이 그려진 책관(冊冠)을 쓰고, 관복을 입었으며 홀을 든 자세를 취하고 있다. 시왕은 다른 인물들에 비해 크게 그려 부각하고 있다.
시왕의 앞에는 목리문(木理文)이 그려진 책상 위에 벼루, 붓 등 문방구가 놓여 있다. 시왕 옆에는 시왕의 재판을 돕는 판관, 녹사, 옥졸, 동자, 천녀 등이 시립해 있다. 홀이나 명부 등을 들고 있는 인물, 오사모(烏紗帽)를 만지는 인물 등 각각의 역할에 따라 다른 자세를 취한다.
하단은 지옥 장면이 중심을 이룬다. 큰 기둥에 묶어 놓고 죄인의 배꼽에서 창자를 끄내는 장면, 목에 칼을 쓴 죄인 앞에서 판관이 두루마리를 펼친 장면 등은 시왕 중 제2대왕에 속하는 초강대왕도(初江大王圖)의 지옥 장면이다. 또 펄펄 끓는 가마솥에 죄인을 넣는 확탕지옥이 그려진 장면은 제4대왕인 오관대왕도(五官大王圖)를 묘사한 것이다.
나머지 세 폭의 불화는 5, 7, 9대왕도와 6, 8, 10대왕도 두 폭이 동국대학교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고, 남은 한 폭은 국내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고 한다. 18세기 근기(近畿) 지역의 시왕도 유형을 볼 수 있는 시왕도이다.
18세기 시왕도는 열 명의 왕을 각각 한 폭에 도해한 형식이 그려지는데 「봉은사 시왕도」의 경우 상, 하의 칸을 분리하지 않고 상단에는 두 명 또는 세 명의 왕이 심판하는 모습을 그릭 아래쪽에는 각각의 지옥 장면을 자유럽게 그리는 독특한 구도를 취하고 있다.
봉은사에 봉안된 불화 중 가장 조성 연대가 올라가는 작품으로, 서울과 경기 지역 시왕도 중에서도 이른 제작 시기의 도상을 보인다. 화기는 없지만 남아 있는 시왕도를 통해 제작 연대, 화승 등의 정보를 확인할 수 있는 시왕도로서 18세기 근기 지역 시왕도의 도상과 특징을 확인할 수 있는 불화로 의미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