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비어스 선교정책은 선교사 네비어스가 중국에서의 선교활동을 위하여 창안한 선교 방법론이다. 네비어스는 1854년부터 1893년까지 중국에서 40년간 선교사로 활동하였다. 네비어스는 선교 경험을 정리하여 1885년에 「선교사의 토착교회 설립 및 육성방안」을 발표하였다. 네비어스 선교 정책은 자전(自傳), 자립, 자치로 요약할 수 있다. 자전은 토착인이 토착인에게 전도하도록 하는 것이다. 자립은 토착 교인이 토착 교회 목회자의 생활비와 교회 운영을 책임지도록 하는 것이다. 그리고 토착 교회 문제를 토착 교인들이 처리하도록 하는 것이 자치이다.
일반적으로 네비어스 선교정책은 ‘3자 원칙’, 즉 토착인이 토착인에게 전도하도록 하는 ‘자전’(自傳, self-propagation), 토착 교인이 토착 교회 목회자의 생활비와 교회 운영을 책임지도록 하는 ‘자립’(自立, self-supporting), 그리고 토착 교회 문제를 토착 교인들이 처리하도록 하는 ‘자치’(自治, self-governing) 등으로 소개되고 있다.
그러나 엄밀한 의미에서 위 ‘3자 원칙’은 네비어스보다 먼저 제시했던 인물들이 있었다. 그들은 1840∼70년대 영국 교회와 미국 교회의 해외 선교 정책을 입안했던 헨리 벤(Henry Venn)과 루퍼스 앤더슨(Rufus Anderson) 등이었고, 네비어스는 그 원칙을 중국 선교 현장에 적용하여 보다 구체적인 방법론으로 정립하였다고 할 수 있다.
네비어스 선교정책의 창안자로 알려진 네비어스는 미국 뉴욕 출생으로, 유니언대학과 프린스턴신학교(Princeton Theological Seminary)를 졸업하였다. 이후 북장로회 중국 선교사로 파송을 받아 1854년 중국 남부 닝보[寧波]에 도착해 선교를 시작, 1871년 동북부 옌타이[煙臺]로 옮겨가 1893년 별세하기까지 40년간 선교사로 활동하였다.
초기 닝보 선교에서는 실패와 좌절을 경험했지만 그 경험을 바탕으로 옌타이에서는 성공적인 선교 결과를 얻었다. 그는 의료선교와 교육선교도 추진했지만, 주로 복음전도와 토착 교회 육성에 중점을 두었다. 그래서 연중 대부분의 시간을 지방교회 순회에 할애했으며, 여름에는 옌타이 선교부에 토착 교회 지도자들을 모아 성경을 가르쳤다.
또한 피폐해진 중국 농촌의 경제적 환경개선을 위한 농업개량 사업도 적극 추진하여 직접 과수원을 조성하고, 포도와 배 등 서양 과수를 들여와 중국인 농가에 보급하기도 했다. 따라서 이러한 네비어스의 선교는 중국 교회뿐 아니라 일반사회 지도자들로부터도 높은 평가를 받았다.
네비어스는 자신의 선교 경험을 바탕으로 중국 선교 전략과 방법론에 대한 글을 쓰기 시작했다. 1885년 『차이니즈 레코더(Chinese Recorder)』에 발표한 「선교사의 토착교회 설립 및 육성방안(Planting and Development of Missionary Churches)」이 대표적인데, 이 글은 1886년 1월 중국 상하이[上海]에서 단행본으로 인쇄되었고, 미국 북장로회 해외 선교부는 그 책을 ‘해외선교 문고’에 포함시켜 선교사 필독서로 출판했다.
이런 과정을 거쳐 네비어스의 선교 방법론은 중국 이외의 지역에도 알려지게 되었다. 네비어스는 1890년 봄 상하이에서 개최된 제2차 중국 선교 10주년 연차대회에서 자신의 선교 정책을 발표한 후, 6월 안식년 휴가를 얻어 귀국하던 중 언더우드의 요청을 받고 서울을 방문하였다.
그는 2주간 머물면서 언더우드(H. G. Underwood)와 마펫(S. A. Moffett), 게일(J. S. Gale), 기포드(D. L. Gifford) 등 북장로회 선교사들에게 자신의 선교 경험과 방법론을 소개하였는데, 1885년부터 선교를 시작한 30대 초반의 한국 선교사들에게 40년 선교 경력의 60대 선교사 네비어스의 경험과 지혜는 큰 도움이 되었다.
한국 선교사들은 네비어스가 제시한 선교 이론과 방법론을 ‘네비어스 선교정책’으로 정리해서 한국 선교에 적용하기로 결의했다. 그리고 뒤에 들어온 미국 남장로회와 호주장로회, 캐나다장로회 선교부에서도 네비어스 선교정책을 수용하기로 했고, 공식 결의는 하지 않았지만 미국 북감리회와 남감리회도 큰 틀에서 네비어스 선교정책을 받아들임으로써 한국 개신교회의 대표적인 선교정책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네비어스가 제시한 선교정책은 다섯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① 교회 지도자들은 자기 동네에서 직업을 갖고 자립생활을 하면서 동역자와 이웃에게 복음전도 사역을 해야 한다. ② 선교사는 토착 교회에 필요하고 또한 운영해 나갈 수 있는 사역과 기관들을 개발해 주어야 한다. ③ 토착 교회가 스스로 목회자를 세우고 생활비를 부담해야 한다.
④ 예배당은 토착 교회 교인들의 헌금과 노력으로 마련하되 토착 양식으로 지어야 한다. ⑤ 매년 토착 교회 지도자들에게 집중 과정으로 성경과 교리를 가르쳐야 한다. 결국 네비어스의 선교정책은 선교부나 선교사의 간섭과 통제는 최소화하면서 토착 교회 지도력 육성을 통해 토착 교회가 스스로 성장하고 발전하도록 돕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언더우드를 비롯한 초기 한국 선교사들은 이러한 네비어스 선교정책을 적극 수용하여 한국 교회의 부흥과 성장을 꾀하였다. 특히 1903∼1907년 초기 부흥운동을 거치면서 한국 교회는 그 지도력이 급성장했고, 결과적으로 스스로 전도하고 자립하며 자치하는 토착 교회로서 위상을 정립할 수 있었다.
그래서 1920년대 미국의 경제공황과 1940년 선교사들의 강제 귀국, 그리고 1960년대 후반 선교사 철수로 외부의 선교지원이 약화된 상황에서도 한국 교회는 위축되지 않고 부흥, 성장할 수 있었다.
그러나 네비어스 선교정책에 대한 비판도 있었다. 우선 경제적 자립 원칙이 토착 교회 유지와 관리에 초점을 맞추어 ‘교회 중심’ 체제가 되면서 사회봉사나 구제사업, 사회적 현안에 대해서는 소극적이 된다는 견해였다. 그리고 봉건적 인습이 남아 있던 한국 교회 안에서의 자치 원칙은 임원 조직의 위계질서로 작용하여 교회의 민주적 운영을 저해하였다는 것이다.
또한 토착 교회 지도자 양성(성경공부와 신학교육)에 관한 권한과 역할을 선교사들이 독점함으로써 한국 교회 목회자의 지적 수준과 신학 발전에 한계를 가져왔다는 것이다. 이처럼 비판받는 부분들도 있지만 네비어스 선교정책이 한국 교회의 부흥과 성장에 결정적인 요인으로 작용하였음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