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연합운동 ()

목차
개신교
사건
개신교회들이 교파와 교단을 초월해서 연합하여 추진하는 선교 및 사회활동.
이칭
이칭
교회일치운동, 에큐메니컬운동
내용 요약

교회연합운동은 개신교회들이 교파와 교단을 초월해서 연합하여 추진하는 선교 및 사회 활동이다. 교회일치운동, 에큐메니컬운동이라고도 한다. 개신교회 선교사들은 선교지에서 불필요한 경쟁과 갈등을 피하고자 하였다. 이에 성경 번역 같은 문서 사업과 사회봉사 사역 분야에서 교파를 초월하여 연합 운동을 추진하였다. 선교사들처럼 한국 개신교회도 일제강점기와 해방 후 시기에 다양한 분야에서 교회연합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해방 후 한국교회 ‘전체를’ 아우르는 연합 운동 단체가 되지는 못하고,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와 한국기독교총연합회(CCK)로 양분되었다.

목차
정의
개신교회들이 교파와 교단을 초월해서 연합하여 추진하는 선교 및 사회활동.
개설

교회일치운동 혹은 에큐메니컬운동(Ecumenical movement)이라고도 한다. 개신교회 선교사들은 선교지에서 불필요한 경쟁과 갈등을 피하고 효율적인 결과를 얻기 위해 성경 번역과 찬송가 발행 등 문서사업과 교육 및 의료사업, 사회봉사 사역 분야에서 초교파 연합운동을 추진하였다. 이러한 선교사들의 연합운동 전통을 계승하여 한국 개신교회도 일제강점기와 해방 후 시기에 다양한 분야에서 교회연합운동을 전개하였다.

내용

1884년 한국 개신교 선교를 개척한 미국 북감리회(미감리회)와 북장로회를 시작으로 1890∼1910년대 미국 남장로회와 남감리회, 캐나다장로회, 오스트레일리아장로회 소속 선교사들이 한국에 들어왔다. 이들 장로교와 감리교 6개 선교부는 이후 추진된 교회연합운동의 중심축이 되었다. 우선 1885년 함께 내한한 북장로회의 언더우드와 미감리회의 아펜젤러는 서울 도착 즉시 한글 성경 번역을 함께 추진하여 1887년 『마가의 전한 복음서언해』를 간행하였다. 이것을 계기로 장로교와 감리교 선교사들은 성경번역자회(후의 대한성서공회)를 조직하여 성경 번역과 출판, 반포 사업을 연합으로 추진하였고, 같은 맥락에서 1890년 대한성교서회(후의 대한기독교서회)를 설립해서 찬송가와 기독교서적, 정기간행물을 초교파적으로 간행하였다.

1903년 원산 부흥운동과 1907년 평양 대부흥운동 과정에서 교회연합운동 분위기는 한층 고조되었다. 그 상황에서 1905년 장·감 6개 선교부가 참여하는 초교파 선교협의기구로 ‘대한복음주의선교회연합공의회’(General Council of Protestant Evangelical Missions in Korea)가 조직되었다. 이 단체는 초기에 선교사들만의 조직으로 운영되었지만, 1918년 한국교회 지도자들이 참여하면서 ‘조선예수교장감연합공의회’로 확대 개편되었고, 1924년 ‘조선예수교연합공의회’, 1931년 ‘조선기독교연합공의회’(Korean National Christian Council)로 개칭되었다. 이 연합공의회를 통해 교육과 의료, 문서출판, 사회복지 분야의 선교사역이 초교파적으로 추진되었다. 이 외에 1902년 설립된 황성기독교청년회(YMCA), 1921년 조직된 조선여자기독교청년회(YWCA), 1922년 조직된 조선여자기독교절제회(WCTU) 등 초교파 평신도 운동단체들도 일제강점기 농촌운동과 절제운동(금주금연운동), 물산장려운동 등민족주의 성향의 사회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일제 말기에 접어들자 이러한 민족주의 성향의 기독교 사회운동은 정치적 탄압을 받았고, 1940년 선교사들이 강제 출국당하면서 교회연합운동은 크게 위축되었다.

8·15해방과 함께 교회연합운동은 다시 활기를 찾았다. 선교사들이 귀환하면서 성서공회와 기독교서회를 비롯한 기독교 학교와 병원, 사회복지 기관은 선교연합기관으로서 그 기능을 회복하였고, 기독교방송(CBS), 극동방송(FEBS) 등 새로운 연합기관도 창설되었다. 해방 전의 연합공의회 전통을 계승해서 1946년 조선기독교연합회(National Christian Council)가 창설되었는데, 기존의 장로교회와 감리교회 외에 구세군과 성결교회, 기독교청년회와 여자기독교청년회도 회원단체로 가입하였다. 해방 후 교회연합운동의 실질적 구심점이 된 이 연합회는 1948년 정부 수립과 함께 명칭을 ‘한국기독교연합회’로 바꾸었고, 1970년 다시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ational Christian Council in Korea, NCCK)로 개칭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그러나 한국기독교연합회(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는 해방 후 한국교회 ‘전체를’ 아우르는 연합운동 단체가 되지는 못했다. 이는 해방 후 한층 심화된 한국교회의 진보↔보수간 신학 갈등과 분열 현상 때문이었다. 한국기독교연합회는 1948년 창설된 세계교회협의회(WCC) 회원이 되었고, 이를 통해 서구의 진보적인 에큐메니컬 신학과 운동을 한국교회에 소개, 전파하였다. 이에 대해 한국교회 다수를 점하는 보수 진영에서 비판과 저항이 일어났다. 특히 6·25전쟁을 겪으며 ‘반공주의’ 분위기가 한껏 고조된 상황 하에 러시아와 동유럽(공산권) 정교회가 회원으로 가입된 세계교회협의회의 ‘용공’(容共) 문제가 제기되면서, 한국기독교연합회에 대한 비난도 고조되었다. 여기에 미국에서 근본주의 신학을 바탕으로 반공주의 노선을 표방하며 조직된 국제기독교연합회(ICCC)까지 개입하면서 한국교회는 세계교회협의회와 한국기독교연합회가 추구하는 에큐메니컬운동에 대한 지지와 반대로 양분되었다. 그 때문에 1959∼60년 장로교회와 성결교회는 교단 분열까지 이어졌다.

이러한 과정을 거치면서 자연스럽게 진보적인 노선의 교회와 기관들로 재편된 한국기독교연합회는 보다 적극적인 자세로 교회일치운동과 사회참여운동을 추구했다. 1970∼90년대 정치적 억압 상황에서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는 세계교회협의회와 아시아교회협의회(CCA) 등 해외 교회연합 기구는 물론 한국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 등과도 연대하여 민주화 운동과 인권 운동, 통일 운동을 전개하였고 그 때문에 정치적 견제와 탄압을 받았다. 그러나 이러한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의 진보적 사회참여 운동에 대한 보수진영의 비판과 비난도 고조되었다. 결국 교세에서 절대 우위를 차지하는 보수주의 교단과 기독교 기관단체들은 1989년 한국기독교총연합회(Christian Council of Korea, CCK)를 결성하고, 한국교회 ‘보수진영’을 대변하기 시작하였다. 이때부터 한국 개신교회는 교회 내부문제 뿐 아니라 정치·사회적 사안에 대해서 진보, 보수로 양분되어 ‘두 목소리’를 내는 현상을 보여주었다. 다만 1990년대 후반부터 기독교윤리실천운동, 기독교남북나눔운동과 같은 ‘중도적’ 기독교 사회운동단체가 조직되어 양극화된 한국교회 현실에서 진보와 보수 양진영의 대화와 협력을 추구한 것에서 새로운 교회연합운동의 가능성을 읽을 수 있다.

참고문헌

『한국교회 에큐메니칼운동사』(신수일, 쿰란출판사, 2008)
『하나 되는 교회 그리고 세계: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70년사』(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70년역사편찬위원회,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1994)
『한국교회와 에큐메니칼운동』(박상증 편, 대한기독교서회, 1992)
『한국에큐메니칼운동사』(전택부,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1979)
“The History of Cooperation and the Federal Council”(H. Miller, The Korea Mission Field, Dec. 19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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