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0년 6월 장로교선교회와 감리교선교회가 연합하여 조션셩교셔회(朝鮮聖敎書會)를 만든 것이 그 시초이다. 당시의 창립위원은 언더우드(Underwood, H. G.)·아펜젤러(Appenzeller, H. G.)·베어드(Baird, W. M.)·기포드(Gifford, D. L.)·존스(Jones, G. H.)·게일(Gale, J. S.)·헐버트(Hulbert, H. B.)·모페트(Maffett, S. A.) 등이었다.
사업자금은 미국·영국의 기독교서회에서 온 원조자금, 장로교·감리교 선교부의 원조, 또 주한선교사들의 회비와 개인들의 기부금 등으로 충당되었고, 출판경영의 인력은 선교사들의 무보수 봉사로 이루어졌다. 초창기의 사무책임자는 빈톤(Vinton, C. C.)이었고 1910년 최초의 유급총무로 본위크(Bonwick, G.)가 임명되었다.
이와 같이, 순전히 선교사들만의 사업으로 시작되었으며, 비영리적인 전도사업의 일부분이라는 성격을 지녔다. 설립된 지 약 10년이 지난 1903년에 이르러서는 총 판매 부수가 25만 부에 달하였으며, 대부분 번역물이었다.
내용은 성서주석·찬송가·교회사 및 신조와 교리, 주일학교 교리 등이었고 전도용 소책자가 다량 출판되었다. 일반교양서적도 다수 포함되어 있었는데, 한글공부, 건강과 위생, 결혼생활, 세계역사, 절제생활 안내, 유아양육, 농민생활에 관한 것 등 다양한 종류의 내용을 담고 있었다.
또한, 1905년부터는 주한외래선교사들을 위한 월간지 『The Korea Mission Field』를 영문으로 발행하여 외국에 한국문화를 소개하는 데 크게 이바지하였다. 본위크가 취임한 이후 출판실적이 비약적으로 증가하여 1910년에서 1911년의 1년 동안 15만 부의 출판물이 발행되었고, 33만 부의 판매실적이 이루어졌다.
1911년 새로이 2층 벽돌양옥을 지어서 본격적인 출판활동에 박차를 가하였으며, 이승만(李承晩)과 신흥우(申興雨) 등의 한국인들도 편집위원으로 활동하게 되었다.
1915년 죠션예수교셔회[朝鮮耶蘇敎書會, The Korean Religious Book And Tract Society]로 개칭되는 한편, 교단연합신문으로 『긔독신보 基督申報, The Christian Messenger』를 발행하게 되어 게일이 편집책임자로 임명되었다.
출판서적의 발행내용이 비교적 단순하였던 과거의 전도 소책자와 초보적인 계몽·교양서적을 넘어서서 종류도 매우 다양해지고 질적 수준도 높아져, 1919년 출판사업을 보다 조직화하여 편집위원회를 최초로 채택하였고 죠션예수교셔회의 영어 명칭도 ‘The Christian Literature Society’로 바꾸었다.
초대 편집위원은 게일·하디(Hardie, R. A.)·클라크(Clark, W. M.)·로드(Rhodes, H. A.) 등이었다. 출판 사업이 점차 확장됨에 따라 새로운 건물이 요청되었고, 1931년 현대식 5층 건물이 마련되었다. 1911년부터 1931년까지 일반도서 321만 부, 잡지 및 신문 323만 부, 전도지 2358만 부가 출판되었다.
1938년에 접어들자, 일제의 기독교 탄압이 가중되어 서회의 출판활동에도 간섭과 박해가 가해지게 되었다. 한편 그 동안 총무직을 맡아 공헌한 본위크가 그해에 정년퇴직하였고, 1939년 명칭이 조선기독교서회로 변경되었다.
1940년 창립 50주년 사업을 탄압 속에서도 계속해 나갔다. 50년 동안 서회는 약 700여 종의 출판서적과 4631만 부의 출판부수, 그리고 4375만 부를 반포하는 사업실적을 올렸다.
그러나 1940년부터 탄압은 더욱 극심해졌으며, 제2차세계대전의 발발과 함께 외국인 선교사들이 추방되자, 1941년 서회의 관리권은 양주삼(梁柱三)에게 맡겨졌다.
1942년 일제는 서회의 재산을 적산(敵産)으로 간주하여 모든 재산운영권을 박탈해 갔기 때문에 서회의 임무는 중단되고 말았다.
1948년 3월 광복 후 최초로 이사회를 열어 남궁혁(南宮爀)을 이사장으로, 김춘배(金春培)를 총무로 임명하여 출판사업의 재건을 도모하였다. 이사회와 편집위원회는 한국인 중심으로 운영되었고, 한국교회의 뒷받침을 받으며 활동을 재개하였다. 명칭도 대한기독교서회로 되었다.
이때의 가장 큰 업적은 합동찬송가의 출판으로 1949년 8월에 간행되었다. 그러나 6·25전쟁으로 다시 커다란 타격을 받게 되었다. 전란 중에 부산에 임시사무실을 두고 출판을 계속하였으나 여건이 여의치 않았다. 다만, 1952년 유일한 아동잡지인 『새벗』이 부산에서 발간되었다.
휴전 후 서울에 돌아와 출판사업의 재건에 적극 노력하였으며, 그 결과 1955년 개신교선교70주년기념 출판사업, 1957년 월간지 『기독교사상』 창간, 1958년 신학교재의 출판, 1960년 점자(點字) 찬송가 발행 등의 업적을 남기게 되었다.
1960년대부터는 서회사업이 커다란 진전을 보게 되어 1962년 평신도신학총서가 출판되기 시작하였고, 가정예배서인 『다락방』의 발행, 1967년 맹인들을 위한 점자 월간지 『새빛』의 창간, 개편찬송가 발행, 그리고 현대사상사(現代思想社)의 설립, 또한 1972년 『그리스도교대사전』의 출판, 1976년 기독교출판사업의 전문화를 위하여 만든 대한기독교출판사의 설립 등의 활동이 전개되었다.
이와 같이 서회는 개화 초기부터 시작하여 한국출판문화의 개척자적인 임무를 수행하였고, 기독교 선교는 물론 한국적인 기독교문화 정착에 많은 기여를 하였다.
1987년 종로사옥에서 강남구 삼성동으로 사옥을 신축·이전한 대한 기독교서회는 현재 매년 50∼100여 종을 발간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