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성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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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신교
인물
일제강점기 승동교회 장로, 경기충청노회 재정위원 등으로 활동한 개신교인.
인물/근현대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862년(철종 13)
사망 연도
1933년
출생지
서울시 관자골(관철동)
관련 사건
형평운동
•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거쳐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내용 요약

박성춘(1862 철종13~1933)은 일제강점기 승동교회 장로, 경기충청노회 재정위원 등으로 활동한 개신교인이다. 백정의 아들로 태어나 백정이 되었다. 1894년 무렵 중병에 걸렸을 때, 무어 선교사가 데려온 에비슨의 치료를 받고 나은 후 교회에 출석하였다. 기독교를 통해 ‘만민평등’의 기치를 깨달은 박성춘은 백정 해방운동을 전개하였다. 1898년 독립협회가 주최한 관민공동회에 시민 대표로 나가 ‘충군애국’을 주제로 연설하였다. 1911년 인사동 건립된 승동교회 장로로 선출되었고, 경기충청노회 재정위원으로도 활약했다.

목차
정의
일제강점기 승동교회 장로, 경기충청노회 재정위원 등으로 활동한 개신교인.
생애 및 활동사항

1862년 서울시 관자골(관철동)에서 백정의 아들로 출생하여, 그도 백정이 되었다. 1894년 무렵 중병에 걸려 위기에 처했을 때 아들(봉출)이 다니던 곤당골(미장동) 예수교학당의 무어(S. F. Moore)가 제중원 의사이자 고종황제 시의(侍醫)였던 에비슨(O. R. Avison)을 데리고 와서 치료해준 후 살아났다. 이를 계기로 그는 무어 선교사가 지도하는 곤당골교회에 출석하였는데, 그곳 양반 교인들이 “백정과 함께 예배를 드릴 수 없다.”며 박성춘을 다른 곳으로 보낼 것을 요구하였다. 하지만 무어 선교사는 ‘만민평등’을 내세우며 그들의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았고, 이에 양반 교인들이 홍문서골(홍문동)로 교회를 분립해 나갔다. 박성춘은 서울, 수원, 평택, 양주, 포천 등지의 백정 마을을 다니며 전도하였고, 1년 사이에 백정과 천민 출신들로 곤당골교회가 가득 차게 되었다. 이후 경기도 수원에도 백정들이 교회를 세울 수 있었다.

이처럼 기독교를 통해 ‘만민평등’의기치를 터득한 박성춘은 백정 해방운동을 전개했다. 1894년 가을 김홍집 내각의 갑오개혁으로 명목상으로는 조선 사회의 신분제도가 철폐되었지만, 백정에 대한 사회적 편견과 차별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실제로 백정들이 정부 칙령만 믿고 도포를 입고 밖에 나갔다가 구타를 당하는 일이 빈번하였다. 이에 박성춘은 1895년 4월 곤당골 예수교학당의 무어 선교사와 한국인 교사의 도움을 빌어 백정 차별제도 철폐를 다시 확인해 달라는 탄원서를 내각에 제출하였다. 당시 내부대신 유길준은 이런 백정들의 탄원을 받아들여, 그 해 5월 13일 백정들을 차별하지 말라는 내용의 칙령을 다시 한 번 반포하고 그 내용을 방으로 써 붙였다. 그날 ‘5백년 만에’ 도포를 입고 갓을 쓰고 감격한 백정들이 종로거리에서 시위를 하였다. 박성춘은 계속해서 그해 11월, 이듬해 3월에 서울 뿐 아니라 지방에서도 같은 조치를 취해 달라는 탄원서를 냈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민중 계층의 지도자로 부각된 박성춘은 일반 시민사회운동에도 적극 참여하였다. 대표적인 예로 1898년 10월 28일 서울 종로에서 독립협회가 주최한 관민공동회에 박성춘이 시민 대표로 나가 ‘충군애국’을 주제로 연설하는 사건이 있었다. 이에 대해 한말 역사가 정교(鄭喬)『대한계년사(大韓季年史)』에 그 내용을 “이국편민(利國便民)의 길인즉 관민이 합심한 연후에야 가하다고 생각한다. 차일(遮日)에 비유컨대 한 개의 장대로 받친 즉 역부족이나 많은 장대가 합친 즉 그 힘이 견고하다. 원컨대 합심하여 우리 대황제의 성덕에 보답하고 국조(國祚)로 하여금 만만세를 누리게 하자.”고 소개하였다.

한편 박성춘이 출석하던 곤당골교회는 1898년 화재로 예배당이 소실되어 무어 선교사의 주선으로 홍문서골교회와 통합해서 예배를 드리게 되었다. 이 교회는 1905년 인사동에 새 예배처소를 마련해 옮기면서 승동교회가 되었는데, 박성춘은 1911년 이 교회 장로로 선출되었고, 경기충청노회 재정위원으로도 활약했다. 이후 선교사들의 기록에 의하면 박성춘은 ‘금융 관련’(banker) 일을 한 것으로 전해지며, 박서양(朴瑞陽)으로 이름을 바꾼 아들은 세브란스의학교를 제1회로 졸업한 후 모교 교수로 활약하다가 1918년 만주로 이주하여 그곳에서 병원을 개원하였다. 이때 박성춘도 아들 가족과 함께 서울을 떠난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33년 별세하였다.

참고문헌

『새로 쓴 한국그리스도인들의 개종이야기』(이덕주,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2003)
『승동교회 120년사』(대한예수교장로회 승동교회, 1996)
『토박이신앙산맥』(전택부, 대한기독교출판사, 1977)
Caring, Growing, Changing: A History of the Protestant Mission in Korea( M. Huntly, New York: Friendship Press, 1984)
“The Butchers of Korea”(S. F. Moore, The Korean Repository, Apr. 1898)
집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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