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역자 게일은 1888년 내한해서 1890년부터 성서번역위원으로 참여하였기 때문에 성경 번역의 경험이 풍부한 초기 내한 선교사 중 한 명이었다. 1900년 신약, 1910년 구약 번역이 완료되어 한글 성경이 출판된 직후 대영성서공회는 성경 개역(revision) 작업에 착수하여 1911년 개역자회를 조직하였는데, 게일도 참여하였고 1917년부터 회장직을 맡아 구약 개역 작업을 추진하였다. 그런데 게일은 번역 원칙과 방법에서 다른 번역자들과 의견이 달랐다. 대부분의 번역자들은 성경 원문과 한글 번역문이 그 뜻은 물론이고 양도 비슷해야 한다는 ‘축자적’(literal) 번역 원칙을 고수한 반면 게일은 ‘조선어풍’(朝鮮語風)이라 하여 한국인들이 이해하기 쉽게 “성경의 내용을 가감 없이, 그러나 이해할 수 없는 히브리-영어식 문장이 아니라 부드럽고 쉬우며 매끄럽게 흘러가는 조선어로” 번역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런 게일의 주장은 성경 본문을 훼손해서는 안 된다는 다른 번역자들의 반발을 불러왔다. 특히 1921년 게일의 번역 원칙을 따른 「창세기」 교정지를 둘러싸고 번역자들 사이에 격렬한 논쟁이 전개되었고, 대영성서공회의 지지를 얻지 못한 게일은 결국 1923년 개역자회 회장직을 사임했다.
개역자회에서 탈퇴한 게일은 오랫동안 번역 작업에 동참했던 이원모, 이교승, 이창직 등 한국인 번역자들의 도움을 받아 독자적으로 성경 번역에 매진하여 1924년 구약, 1925년 신약 번역을 마쳤다. 그렇게 해서 마련된 번역 원고는 조선기독교창문사 대표 윤치호가 출판비(2만원)를 대서 1925년 12월 31일 『신역 신구약전서(新譯新舊約全書)』라는 이름으로 출판되었다. 게일과 이원모를 공동 번역자로 표기한 서문에서 “대저 번역하는 일에 두 가지 원칙이 있으니 저작자의 본뜻을 분명히 아는 것이 그 하나이오 그 본뜻을 가지고 각기 지방의 어풍과 문법을 따라 가는 것이 그 둘이라. 본 성경을 번역할 때에 창세기로부터 묵시록까지 할 수 있는 대로 조선어풍에 어기지 아니하기로 노력하였노라.”고 번역 원칙을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
게일번역 신구약 성경에 대한 당시 한국 교회의 평가는 엇갈렸다. 대영성서공회가 주도하는 성경 개역 작업에서 이탈하여 개인 번역 성경을 낸 것에 대한 비판적인 여론도 있었지만, 독자 위주의 성경 번역 이론을 새롭게 도입했다는 점에서 ‘20세기 번역’(Twentieth Century Version) 혹은 ‘조선의 모펫 성경’(Moffett Translation)이라는 평가도 받았다. 그러나 이 성경은 기대한 만큼 한국 독자들로부터 호응을 얻지 못했다. 우선 이 성경은 공중 예배의식에서 사용할 수 없는 개인 번역 성경이란 한계를 극복하지 못했고, 지식인을 겨냥하여 국한문 혼용체로 인쇄한 것도 한글만 아는 부녀자와 민중 계층의 접근을 어렵게 만들었다. 또한 게일이 평소 총독부의 한반도 정책을 지지하는 발언을 자주 해서 ‘친일 성향’의 선교사로 인식되었던 것도 한국 독자들의 외면을 가져온 원인 중 하나라 할 수 있다. 게일은 성경 출간 2년 후 1927년 6월 안식년 휴가를 얻어 귀국했다가 이듬해 은퇴하여 40년의 한국 선교를 마감하였다.
책 크기는 19×13㎝, 본문은 국한문 내려쓰기, 2단 편집으로 되었으며 구약 796쪽, 신약 310쪽, 총 1,106쪽이었고, 원색 성경 지도 2매가 첨부되어 있다. 성경 목차에 각 성경의 장수는 물론 통독 시간까지 적어 신구약 전체를 읽는데 79시간 17분이 소요된다는 사실을 알린 것이 특이하다. 제본은 두 종류로 되었는데 당시 고급 양장은 2원 70전, 반양장은 2원 25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