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락원은 1909년 설립된 개신교 사회복지 기관이자 의료선교 기관이다. 대구애락원, 애락보건병원이라고도 한다. 1909년 내한한 선교사 플레처가 대구에 초가집을 마련하고 한센환자 20여 명을 수용하였다. 1924년에 2층 벽돌 건물로 증축하면서, ‘퍼커스버그 기념관’이라 칭하였고, 한글 명칭도 애락원으로 바꿨다. 플레처 원장이 1942년 6월 강제 출국당하면서 애락원은 위기를 맞기도 하였다. 해방 후 1949년 당시 1,750명 환자를 수용할 정도로 성장하였다. 2013년 10월 병원 설립 100주년 기념으로 애락원 역사 자료관을 개관하였다.
선교사들에 의해 설립된 한센병 치료 및 요양기관으로 처음에는 ‘대구문동병원’ 혹은 ‘대구나환자병원’, ‘대구나병원’으로 불리다가 1924년부터 애락원으로 불렸다.
여수 애양원과 부산 상애원에 이어 한국에서 세 번째 설립된 기독교 한센환자 치료기관인 애락원은 1909년 내한해서 이듬해 대구 동산병원 원장이 된 미국 북장로회 선교사 플레처(A. G. Fletcher, 별리추)가 대구 부임 직후 남성정(南城町)에 초가집을 마련하고 한센환자 20여 명을 수용한 것에서 출발한다. 처음에는 격리 수용하는 정도였다가, 1913년 12월 영국 구라선교회(Mission to the Lepers of India and the East) 설립자 베일리(W. C. Baily) 부부가 부산 나병원을 시찰하러 내한했다가 대구를 방문해 지원을 약속함으로써 나병원 건립이 구체화되었다.
플레처 원장은 1914년 베일리가 보내 온 건축비 5천 달러로 1915년 달성군 달서면(현 대구시 서구) 내당동에 1만 8천여 평 부지를 확보, 1916년 1백 명을 수용할 수 있는 벽돌 건물을 짓고, 1917년 1월부터 환자를 수용하여 치료하기 시작했다. 병원은 개원하자마자 1백 명의 수용인원이 가득 찼다.
1917년 9월 대구나병원 봉헌식에 참석했던 미국 구라선교회 대너(W. M. Danner) 총무가 보내 준 선교비에 조선총독부 지원금(7,700원)을 합쳐 1924년에 난방시설을 갖춘 2층 벽돌 건물로 증축하면서, ‘퍼커스버그 기념관’(Parkersburg Hall)이라 칭하였고 한글 명칭도 애락원으로 바뀌었다. 3백 명을 수용할 수 있는 본관 건물 외에 시약소와 수술실, 그리고 예배당까지 마련했고, 1938년 미감아(未感兒)를 위한 생활공간도 지었다.
1914년 병원 부속 교회가 설립되어 전담 목회자까지 두었는데 거의 전 환자가 세례를 받고 교인이 되었으며, 주일학교 학생만 2백 명을 넘었다. 환자 교인들은 성경공부에 열정적이었는데, 신약성경 ‘마태복음부터 디모데후서까지 암송하는 맹인 환자’도 있었다고 한다.
애락원은 플레처 원장이 1942년 6월 강제 출국당하면서 위기를 맞았지만, 해방 후 플레처를 비롯한 선교사들이 귀환하면서 병원 기능을 회복하여 1949년 당시 1,750명 환자를 수용할 정도로 급성장하였다. 1957년에는 달성군 구지면 수리리에, 1962년에는 의성군 금서면 도경리에 음성환자를 위한 자활촌을 건설했으며, 1968년 병원 명칭을 ‘대구애락보건병원’으로 변경하였다.
그러나 1980년대 들어서 한센병이 소멸됨으로 애락원은 한센병 치료보다는 일반 병원으로 변화를 모색하여 1995년 외부 진료를 시작하였고, 2004년 대구애락원으로 명칭을 변경하였다. 2013년 10월 병원 설립 100주년 기념으로 설립자 플레처의 후손을 초청하여 기념식을 거행하였고, 애락원 역사자료관을 개관하였다.
1995년 한센병 치료기관으로서 대구애락보건병원을 폐업하고, 재단법인 대구애락보건병원 부속의원이란 명칭으로 외래환자 진료(특수 피부과, 피부과, 가정의학과)를 시작하였다. 2004년 법인 명칭을 대구애락원으로 바꾸었으며, 2007년 법인 부속으로 화상환자 전문치료를 위한 광개토병원을 개설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