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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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주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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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특별시 관악구에 있는 조선후기 천주교 관련 성지(聖地). 천주교성지 · 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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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서울특별시 관악구에 있는 조선후기 천주교 관련 성지(聖地). 천주교성지 · 산.
내용

1836년(헌종 2) 이후 조선에 들어와 활동하던 모방(P. P. Maubant, 羅伯多祿) 신부와 제2대 조선교구장 앵베르(L. J. M. Imbert, 范世亨) 주교, 그리고 샤스탕(J. H. Chastan, 鄭牙各伯) 신부 등 3명의 프랑스 선교사들은 기해박해가 일어나 피신했으나 은신처가 드러나고 말았다. 그러자 앵베르 주교가 8월 10일에, 그리고 모방 신부와 샤스탕 신부가 9월 6일에 각각 자수하여 포도청과 의금부에서 신문을 받은 뒤 1839년 9월 21일(음 8월 14일) 새남터에서 군문 효수형을 받아 순교하였다. 세 선교사들의 시신은 3일간 효시를 당한 뒤 강변 모래밭에 함께 매장되었는데, 약 20일 뒤에 박 박오로 등이 그들의 시신을 거두어 지금의 서강대 뒷산 노고산에 안장하였다.

그들의 유해는 1843년(헌종 9)에 박 바오로 등에 의해 다시 발굴되어 과천 서쪽 봉우리인 삼성산(三聖山) 북쪽 끝자락의 박씨 선산에 안장되었다. 박 바오로는 그 이장 경로와 유해가 안장되어 있는 장소를 아들 박순집에게 자세히 알려 주었고, 박순집은 훗날 기해·병오박해 순교자들에 대한 시복 수속이 진행되자 이러한 사실을 교구에 보고하여, 시복 판사로 활동하던 푸아넬(V. L. Poisnel, 朴道行) 신부가 1886년(고종 23)경에 이들의 무덤을 확인했다. 1901년 10월 21일 이들의 유해가 발굴되어 용산 예수성심신학교로 옮겨졌다가 같은 해 11월 2일 다시 명동 성당 지하 묘지로 옮겨졌다. 이들 3명은 1925년 복자품에 올랐고 1984년 시성되었다.

1970년 봄 대방동 본당 주임 오기선 신부는 최석우 신부 등의 도움을 받아 삼성산 무덤 자리를 찾은 뒤, 같은 해 5월 12일 그 자리에 ‘삼성산 순교 성지 기념비’를 건립하여 김수환 추기경, 노기남 대주교, 박순집의 후손 등이 참석한 가운데 축복식을 가졌다. 1981년 9월 6일에는 신림동 본당 신자들이 노기남 대주교의 집전 아래 삼성산에서 세 복자 묘비 제막식을 갖고 기념 미사를 봉헌하였다. 이로써 삼성산을 순례 성지로 성역화 하려는 사업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또한 서울 대교구와 신림동 본당에서 1989년 무덤 자리 일대의 임야 약 16,000평을 확보한 뒤 세 성인의 무덤을 조성하여 명동 성당 지하 묘지에 남아 있던 유해 일부를 가져와 무덤 안에 안치하고 제대 등을 설치한 다음 교황 대사 이반 디아스 대주교 등이 축복식을 거행했다.

‘삼성산’이란 명칭은 본래 고려 말 명승 나옹·무학·지공이 수도한 곳이라는 데서 유래되었으나, 이곳에 세 선교사의 유해가 안장되고 그들이 시성되어 성인품에 오름에 따라 천주교회 안에서는 ‘삼성산’을 ‘세 명의 성인 유해가 안장된 성지’로 설명하게 되었다. 1992년 9월 24일 삼성산 본당이 신림동 본당에서 분리되어 설정되면서 삼성산 성지의 관리는 삼성산 본당에서 맡아 현재에 이르고 있다.

참고문헌

『순교자들의 얼을 찾아서』(오기선, 한국천주교성지연구원, 1988)
『한국천주교회사』중(달레 저, 안응렬·최석우 역주, 한국교회사연구소, 1980)
천주교 삼성산 성당(www.ssss.or.kr)
집필자
서종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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