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확한 한자음은 ‘침과정’인데, 관례상 ‘침괘정’으로 부른다. 침과는 ‘창을 베개로 삼는다’는 뜻으로, 병자호란의 치욕을 되새긴다는 의미이다.
정확한 창건 시기는 알 수 없다. 다만『남한지(南漢志)』에 의하면, 1624년(인조 2)에 남한산성을 쌓을 때 수어사(守禦使) 이서(李曙, 15801637)가 울창한 숲에서 그 흔적을 발견하였다고 하며, 주변은 백제 온조왕의 왕궁터라고 전한다. 하지만 주변에는 군기고(軍器庫)가 있었다고도 하므로, 이서가 발견한 흔적은 군기고였을 가능성이 크다. 그 뒤1751년(영조 27)에 광주유수(廣州留守) 이기진(李箕鎭, 16871755)이 짓고는 침괘정이라고 불렀다.
앞면 7칸, 옆면 3칸에 겹처마 팔작지붕을 올린 모습인데, 누정 건물로는 규모가 큰 편이다. 기둥 배열만으로 보면, 가운데에 도리통 5칸, 양통 1칸의 내진부(內陣部)를 두고, 그것의 네 주변에는 툇간[退間]을 둔 내외진형(內外陣形)구조이다. 하지만 실제 공간의 구성은 한쪽에 도리통 2칸, 양통 3칸의 넓은 대청을 두고서, 이것에 3면으로 툇간을 돌린 도리통 4칸, 양통 1칸 규모의 온돌방을 붙여, 기둥 배열과 공간 구성이 일치하지 않는 독특한 평면을 이루고 있다.
이익공식(二翼工式)으로 2고주(高柱)7량(樑)의 가구(架構)인데, 보는 모두 직선으로 다듬었다. 동자기둥을 사용하였고, 대공은 판대공(板臺工)으로 끝부분에 화초를 조각한 파련대공(波蓮臺工)이다. 네모기둥은 비교적 굵은 편으로 흘림은 거의 느낄 수 없는데, 모서리를 접고서 4면에 2줄의 둥근 선인 쌍사(雙絲)를 내었다. 대부분 우물천장으로 꾸몄지만 대청과 툇마루는 연등천장이다. 온돌방에는 우물마루를 설치하였고, 합각에는 풍판(風板)을 두었다. 받침은 긴 돌을 1단으로 쌓은 외벌대이며, 주춧돌은 자연석을 네모지게 약간만 가공하였다.
이 누정은 이익공식 짜임 방식, 화초를 새긴 초각(草刻), 가구 기법, 기둥의 마름질 수법, 우물천장의 구성, 단청 수법 등에서 조선 후기에 궁궐 건물에 사용하였던 전형적인 관식(官式) 기법이 갖추어져 있다. 다만 3면에 퇴를 둔 4칸의 온돌방과 넓은 대청으로 보아, 단순한 누정이 아닌 특별한 사용 목적을 위해서 건립된 것으로 보인다. 곧주변에 자리하였던무기고나 무기제작소 등을 관리하던 관인의 집무실로 사용되었을 가능성이 있다.조선시대의 군사 관련 건물을 살피는데 귀중한 자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