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95년(정조 19)에 어촌(漁村) 양훤(楊晅, 1597∼1650)을 향사하기 위해 건립된 서원이다. 1868년(고종 5)에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에 의해 훼철된 뒤 1899년(광무 3)에 양훤의 8세손 양전환(楊典煥), 양종환(楊淙煥), 9세손인 양정규(楊定奎) 등이 서원 유허지에 제단을 설립하고, 서원 근처에 광산서당(光山書堂)을 건립하였다. 1983년 8월 6일에 경상남도 문화재자료(현, 문화유산자료)로 지정되었다.
양훤은 동계(桐溪) 정온(鄭蘊)의 문인이다. 성균관 유생 시절 광해군이 인목왕후(仁穆王后)를 폐하고 스승이 화를 당하자 낙향하여 은거하였다. 인조 때 태학사를 지내고, 병자호란 때 남한산성이 포위되자 의병을 일으킨 뒤 다시 낙향하여 종신토록 은거하였다. 미수 허목(許穆)과 교유하였으며, 사후에는 허목이 묘지명을 지었다.
1899년 후손들이 서원터 근처 이강(梨岡) 아래에 다시 건립한 광산서당은 서원 건물로서는 흔하지 않은 ‘ㄱ’자형 구조로 이루어져 있다. 정면 5칸에 동쪽을 ‘ㄱ’ 자로 잇대어 ‘루(樓)’를 만들었다. 정면의 좌측 2칸은 재, 가운데 2칸은 강당으로 구성하여 ‘광산서당’이라는 편액을 걸었으며, 우측의 루는 2칸으로 분리하여 당호를 ‘춘성루(春成樓)’라 하였다. 광산서당 관련 기록으로는 척암(拓菴) 김도화(金道和)가 지은 「광산서당중건기(光山書堂重建記)」가 남아 있다.
현재 광산서당에는 고려 말 중국에서 귀화한 양기(楊起)와 그의 12세손 양허국(揚許國), 허국의 아들 양훤, 양훤의 아들 양도남(揚道南) 등 4인의 글을 모아 한말에 4책으로 간행한 『청주세록(淸州世錄)』 목판 135판이 보관되어 있다. 1책은 양기의 사적, 2책은 양허국의 문집, 3책은 양훤의 글을 모은 『어촌유고(漁村遺稿)』, 4책은 양도남의 글을 모은 『무금당유고(無禁堂遺稿)』로 구성되어 있으며, 사미헌 장복추가 양도남의 7세손 양응규의 청으로 이 책의 발문을 지었다.
광산서원과 『청주세록』의 목판은 창녕지역에 대대로 세거해온 청주양씨 문중의 대표적 유적 · 유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