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08년(숙종 34)에 단양우씨의 현조인 우현보(禹玄寶)와 임진왜란 때 의병장 우배선(禹拜善)을 향사하기 위해 건립된 서원이다. 1868년(고종 5)에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으로 훼철된 후 1965년에 후손들이 다시 건립하였다.
우현보와 우배선을 향사하기 위해 덕동서원(德東書院)이라는 명칭으로 1708년에 건립되었다. 서원 철폐령으로 훼철된 이후 건물도 없어졌으나 1965년 단양우씨 판서공파 17대손인 우종식, 우종묵 형제가 사비로 다시 건립하여 낙동서원(洛東書院)으로 명칭을 변경한 후 향내 유림에 헌납하였다. 현재는 우현보와 우배선 외에 우탁(禹倬), 신현(申賢), 우길생(禹吉生)을 함께 모시고 있다. 그 중 우탁은 본래 예안의 역동서원에서 향사하였으나 역동서원이 1871년(고종 8)에 훼철되자 낙동서원에서 다시 모신 것이다.
서원은 사당인 계현사(啓賢祠)와 강당인 정교당(正敎堂)으로 구성되어 있다. 계현사는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의 단층 맞배지붕이며, 이익공 형식의 건물로 매 칸마다 사분합문의 문을 달고 단청으로 장식하였다. 정교당은 정면 8칸, 측면 2칸의 ‘ㄱ’자형 구조를 하고 있어 강당과 더불어 동서재의 기능을 동시에 담당하고 있다.
3칸의 강당에는 ‘낙동서원’이라는 편액이 걸려 있으며, 동쪽 재실은 ‘처인헌(處仁軒)’, 서쪽 재실은 ‘지경재(持敬齋)’라 당호를 붙이고 편액을 걸었다. 전면으로 돌출된 부분은 2칸의 누마루이고 나머지 2칸은 온돌방으로 구성되어 있다. 강당을 중심으로 동쪽과 서쪽에 재실을 배치한 조선시대 일반 서원의 강학 공간 배치와 달리, 낙동서원은 ‘ㄱ’자형의 건물 안에 강당과 두 개의 재실을 배치한 것이 특징이다.
『단양우씨삼세문헌록(丹陽禹氏三世文獻錄)』에 1708년 창건 당시 봉안문과 축문이 수록되어 있으며, 1965년 낙동서원을 건립한 뒤 각계각층에서 지은 시를 모집·선발하여 1967년에 『낙동서원건립시집(洛東書院建立詩集)』을 간행하였다. 매년 음력 3월과 9월에 향사를 지내고 있다.
조선 후기 문중서원의 현대적 변천을 확인할 수 있는 좋은 사례이다. 특히 1967년에 낙동서원의 건립을 기념하기 위해 간행한 『낙동서원건립시집』은 단양우씨 후손들의 숭조의식을 잘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