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12년(숙종 38)에 정언신(鄭彦信, 1527∼1591), 남영(南嶸, 1548∼1616), 심대부(沈大孚, 1586∼1657), 김낙춘(金樂春, 1525∼1586), 이심(李襑, 1598∼1657) 등 5현을 제향하기 위해 창건한 서원이다. 1745년(영조 21)에 훼철되었다가 1801년(순조 1)에 복설되었다. 1871년(고종 8)에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으로 다시 훼철되었으나 1990년에 복원되었다.
소양서원은 16세기 가은 인근 지역에서 출생하여 중앙에서 관직생활을 하다가 만년에 고향으로 돌아와 지역사회에서 활동한 5인을 제향한 서원이다. 정언신을 주향, 김낙춘 · 심대부 · 이심을 배향으로 모시고, 남영은 후대에 추배하였다. 영조대에 이 서원에 제향된 정언신이 정여립의 당이라는 이유로 조정에서 철향 대상으로 논란이 되다가 결국 1745년에 훼철되었다. 이후 복설과 훼철을 거듭하다 1990년 복원되어 현재까지 매년 음력 9월 상정일에 향사를 봉행하고 있다. 2006년 6월 15일에 경상북도 문화재자료(현, 문화유산자료)로 지정되었다.
정언신은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동래(東萊)이다. 1566년(명종 21) 별시문과에 급제하여 대사헌, 부제학, 함경도관찰사, 병조판서 등을 역임하였다. 1589년 우의정이 되었으나 정여립의 일파로 모함을 받아 남해, 갑산에 유배되어 사망하였다. 1599년에 복관되었다. 남영은 본관이 의령으로 유성룡, 이정귀의 천거에 의해 조지서별제(造紙署別提)에 제수되고, 여러 관직을 역임하였다.
심대부는 조선 후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청송이며 한강 정구의 문인이다. 1613년(광해군 5) 진사, 1633년 문과에 급제하여 송화현감, 경상도사 등을 역임하였다. 1649년에 인조가 죽자 사간으로서 유계(兪棨) 등과 조(祖) 자의 묘호를 반대하다가 왕의 노여움을 사 회양으로 귀양갔다가 1657년에 풀려났으며, 사후 신원되었다. 김낙춘은 본관이 순천이며, 이황의 문인이다. 1545년(인종 1) 생원 · 진사시에 합격하였으며, 재상 이준경이 천거하였으나 끝내 사양하고 문경으로 이거하여 소양동(瀟陽洞)에 영류정(暎流亭)을 짓고 후진 양성에 힘썼다.
이심은 본관이 연안, 호는 가은(稼隱)으로 감사 이창정(李昌庭)의 아들이다. 광해조에 세상이 크게 어지러운 것을 보고 몸을 깨끗이 하고 스스로를 지켰다. 과거 보기를 그만두고 가족을 이끌고 안동 송치로 이거하여 농사를 지으면서 후학 교육에 평생 종사하였다.
현존하는 경내의 건물로는 사당, 강당, 동재가 있으며, 서원의 동쪽으로 정면 4칸, 측면 3칸 규모의 한류정(暵流亭)과 정면 3칸, 측면2칸 규모의 존승재(尊承齋)가 별도의 일곽을 이루며 나란히 배치되어 있다. 심대부를 봉안할 때의 봉안문과 축문은 식산(息山) 이만부(李萬敷)가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