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35년(헌종 1)에 임진왜란 당시 명나라 장수로 조선에 귀화한 천만리(千萬里, 1543∼?)의 영정을 봉안하기 위해 경상북도 청도군에 건립한 서원이다. 1868년(고종 5년)에 대원군의 서원 훼철령에 의하여 훼철된 뒤 1952년에 복원하였다.
1833년(순조 33)에 천만리의 10세손 천석규(千錫奎)의 집에서 비장의 문서와 천만리의 영정이 발견되었는데, 이 영정을 봉안하기 위해 사당을 건립하고 1835년(헌종 1) 청도군 동일면 삼성동 대황산(大皇山) 줄기에 서원을 건립하였다. 마침 산의 명칭에도 ‘황’자가 들어가고 천만리도 명나라 출신 장수이기 때문에 서원의 명칭을 ‘황강(皇岡)’이라고 하였다. 1868년(고종 5년)에 훼철된 후 1924년에 현 위치로 옮겨 선생의 영정을 봉안하고 영당만을 복원하였다. 이후 1952년에 후손들과 유림이 의논하여 경모계를 결성하고 서원을 복원하였다. 서원 뜰에는 천만리의 12세손인 천병하(千炳夏)가 찬한 묘재비(墓齋碑)가 세워져 있다.
천만리는 본관이 중국 영양(穎陽), 자는 원지(遠之), 호는 사암(思庵)이다. 1571년 무과에 급제하여 1575년에 총절사(總節使)가 되어 몽고군을 격퇴하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조병영량사(調兵領糧使)로서 아들 상(祥)과 함께 이여송(李如松)을 따라 조선에 왔다. 평양전투를 비롯하여 곽산, 동래 등지에서 전공을 세웠다. 왜란 후 귀국하지 않고 조선에 머물러 살았다. 이후 선조는 그를 화산군(花山君)에 봉하고 전(田) 30결(結)을 급복(給復)하였으며 그의 아들 상도 뒤에 한성윤에 승진시켰다. 저서로 『사암천문집』이 있으며, 시호는 충장(忠莊)이다.
현존하는 경내의 건물로는 삼문과 강당, 사당인 충장사, 부속채 등이 있다. 사당인 충장사(忠莊祠)는 강당의 뒤편에 위치하고 있으며 정면 3칸, 측면 1칸 규모의 팔작지붕 겹처마 구조이다. 익공집으로 정면의 문에는 흔치 않은 상인방이 휘어져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강당은 정면 4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홑처마 건물로 중앙의 마루를 두고 양쪽에 협실을 두었으며 ‘황강서원(皇岡書院)’이라는 편액이 걸려있다.
황강서원에서 소장하고 있던 ‘화산군 천만리선생 영정(花山君千萬里先生影幀)’은 현재 한국국학진흥원에 기탁하여 보관하고 있다. 1846년(헌종 12) 황강서원에서 천만리의 문집인 『사암실기(思庵實記)』를 간행하였는데, 발문은 면우(俛宇) 곽종석(郭鍾錫)이 썼다. 이후 후손들의 유사(遺事) 및 시문 등을 부록으로 추가하여 1904년에 중간본이 간행되었다. 서울대학교 규장각 등에 소장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