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는 석계(石溪). 서울 출신. 세거지는 강화도. 성종(成宗)의 열세번째 아들 영산군(寧山君)의 15대 손. 1936년 경성사범학교부속보통학교(京城師範學校付屬普通學校) 졸업 후 휘문중학(徽文中學, 5년제)에 진학하여 1942년 졸업하였다.
그 해 경성제국대학(京城帝國大學) 예과(豫科)에 진학하여 1944년 수료 후 바로 법문학부(法文學部)에 진학하였다. 해방되어 1947년 8월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하게 되었다. 1947년 9월 서울대학교 대학원에 진학하여 1949년 7월 석사학위를 취득하였고, 이어 1951년 8월에 국어국문학과 박사과정을 수료하였다. 1974년 2월 박사학위를 취득하였다.
1947년 8월 석사학위 취득 후 바로 서울대학교 강사로, 1949년에서 1951년까지 조교로 근무하다가 1951년 해군사관학교 교관으로 입대하여 1953년 소령으로 예편하고 그 해에 성균관대학교 조교수로 임명되었다.
이후 1983년까지 성균관대학교 교수로 봉직하면서 교무처장, 도서관장과 박물관장을 역임하였다. 1975년부터 1979년까지 교무처장직을 맡아 대학 행정의 기반을 확고히 하는 데 기여하였다. 1979년 타이완 정치대학 객좌교수를 다녀온 후, 1981년 1월부터 1982년 2월까지 한국정신문화연구원 사전편찬부장으로 파견 근무를 하였다.
1983년 3월 춘천 한림대학으로 자리를 옮겨 신설 대학의 학문적 기틀을 마련하고, 70세이던 1994년 8월, 같은 대학 국문학과 교수로 정년퇴임하였다. 1994년부터 2000년까지는 명지대학교에 출강하여 노학자로서 역량을 발휘하였다. 퇴임 후 일반인이 부담 없이 쉽게 읽을 수 있는 교양서 성격의 한국문학사를 저술하겠다는 뜻을 세우고 집필에 몰두하던 중이던 2005년 6월 17일, 현대 문예사조 부분을 마무리하지 못한 상태에서 조선후기 문학사까지의 미완의 원고를 남기고 작고하였다.
이명구는 해방 직후 대한민국의 정체성을 만들어 나가던 시기에 민족문학을 연구하고 교육한 학자로서 고전시가와 고전소설에 두루 관심을 가졌다. 그는 30대부터 「구운몽고」 「고려속요론」 「금오신화 소고」 「경기체가의 형성과정 소고」 등 고려가요와 고전소설 연구에 몰두했다. 그래서 시가에서는 『고려가요의 연구』, 소설에서는 『옛소설』이란 명저 두 권을 출간하여 고전문학 연구사에 문제의식을 던졌다.
그는 『고려가요의 연구』에서 경기체가와 속요를 함께 고찰하였는데, 한림별곡의 주제에 대한 언급은 주목할 만한 것이었다. 퇴폐적·향락적·현실도피적이라 규정하였던 기존의 학설을 비판하고 ‘신흥사대부의 득의에 찬, 명랑하고도 화려한 그리고 유연한 생활정서’를 발견하여 그 주제를 긍정적으로 평가하였다. 또 조선조 사대부의 ‘긍호방탕(矜豪放蕩)’이란 평어를 분석하여 자유분방한 당대 미학으로 환원시켰다. 그리하여 퇴폐와 향락의 어두운 그늘이 드리운 것처럼 부정적으로 평가받던 민족의 중세 시가를 밝고 의욕에 찬 노래로 재평가했다.
『옛소설』에서도 민족 고유의 문학이 지닌 독특한 색채와 향기를 발견하는 안목을 드러내었다. 아름다운 산수 속에서 아름다움을 나타내다 보니 우리 조상들은 낙천적이고 평화적이었으며, 아름다운 시가문학을 통해 정서를 표현하였으며 풍성한 옛이야기를 소유하게 되었다고 여겨, 시가·소설 두 분야에 애정을 두었음을 증명하였다. 물론 스승이던 도남 조윤제의 민족사관을 계승한 흔적도 역력하다.
그는 이 책에서 옛소설을 태동기, 요람기, 성장기, 완성기, 전성기, 변천기로 구분하여 서술하였다. 설화문학의 전통 속에서 소설이 태동한다고 하면서도 중국 문언체(文言體) 소설과 백화체(白話體) 소설의 영향을 주목하여, ‘삼언이박(三言李拍)’ 등 중국소설의 번역과 번안 과정을 상세히 분석하였다. 그리고 우리 옛 소설의 특질로 전기적(傳記的), 가정적, 권선징악적, 호종적(好終的), 운명적 요소를 제시하였다.
정년퇴임 후부터 임종 전까지 몰두하였던 저작이 1050쪽의 방대한 분량으로 남은 『이야기 한국고전문학사』다. 이 책에서는 빗살무늬토기의 분포와 고려장 이야기로 시작하여, 에밀레종이나 낙화암의 민간설화, 승려의 타락과 곡차 이야기, 맹사성의 사람됨 이야기, 김시습의 숨어사는 이야기 등의 이야기로 문학사를 풀어내었다. 시조나 가사의 내용을 이야기로 풀어내는 저력도 만만치 않았으므로 유고(遺稿)의 편찬자는 제목을 『이야기 한국고전문학사』라 하였다. 설화 원문이나 역사적 기록을 풍부하게 수록하고 있고, 고전 작가에 대한 소개도 상세하다. 그는 고전 작품에 대한 현대적 감각의 해설을 통해 한국문학 입문자나 일반 교양인들에게 쉽게 다가갈 수 있도록 배려하였던 것이다.
그가 한국문학을 공부하겠다는 뜻을 품은 것은 일제 시기 경성제대 예과를 다닐 때부터였다. 차별과 억압에 시달리던 상황에서 한 가닥 광명을 찾게 해준 것이 마음의 고향 같던 한국문학이었고, 그 후 광복과 더불어 큰 보람을 느끼며 한국문학 연구에 열정을 쏟아부었다. 그리고 그는 도남 조윤제를 스승으로 모시고 한국문학을 연구하면서 생의 보람을 느꼈다고 한다. 그래서 조윤제를 따라 성균관대학에서 국문학을 일으켰고 민족미학을 계승하였다고 평가할 수 있다. 조윤제, 가람 이병기 등이 한국문학의 제1세대라고 한다면 해방 직후 대학원을 마치고 학계에서 활약한 이명구나 서울대학교의 정병욱 등이 한국문학 2세대로서 해방 후 국문학을 선도하였다고 평가할 수 있다.
『삼민주의(三民主義)』(예문관, 1971) 역서로 타이완 정부로부터 공로상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