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앨버트 테일러 가옥(딜쿠샤)은 서울특별시 종로구 행촌동에 있는 1923년 미국인 기업가 앨버트 테일러가 건립한 서양식 주택이다. 지하 1층과 지상 2층 규모의 붉은 벽돌 건물로, 별칭인 '딜쿠샤'는 '기쁜 마음의 궁전'이라는 뜻이다. 1920년대 서양식 주택의 평면과 구조가 서울의 지형과 기술에 맞추어 이식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복원공사를 거쳐 2021년 역사 전시관으로 개관하였다.
이 주택의 정초석[머릿돌]에는 큰 글씨로 "DILKUSHA 1923"이라고 쓰여 있어서 이 주택의 이름과 건립연도를 알 수가 있다. 또한, 작은 글씨로 "PSALM CXXVII-I"이라고 썼는데, 이는 성경의 ‘시편 127:1’을 말하는 것이다.
집의 별칭인 딜쿠샤는 인도 우타르 프라데시(Uttar Pradesh) 주 러크나우(Luknow)의 곰티(Gomti)강 유역에 폐허로 남은 인도화된 영국 바로크 건물인 딜쿠샤 코티(Dilkusha Kothi)에서 따온 말이다. 딜쿠샤는 산스크리트어인데, ‘기쁜 마음의 궁전’이라는 뜻이다.
메리 테일러(Mary Linely Taylor)가 일찍이 인도에 머물 때 이곳을 찾아보고서는 언제가 자신의 집을 갖게 된다면 ‘즐거운 마음의 궁전’이라는 뜻에서 딜쿠샤라고 이름 붙일 것을 결심하였다고 한다.
앨버트 테일러(Albert Wilder Taylor)는 대한제국기 및 일제강점기에 조선에서 활동한 미국의 기업인 겸 언론인이다. 아내 메리 테일러와는 일본 요코하마[横浜]에서 만나서 1917년에 인도 붐베이에서 결혼하였고, 여러 항구 도시를 거쳐서 한국에 입국하였다.
테일러 가(家)는 한국에서 운산금광과 직산금광 등에서 광산업을 크게 하였는데, 앨버트 테일러는 광산업 이외에 AP통신사의 특별통신원으로 일정 기간 활동하였다. 이때 앨버트 테일러가 3 · 1운동 과정에서 진행된 조선인들의 독립운동과 이를 제압하려는 일제의 학살행위를 알리는 데 기여를 하였다. 이후에 앨버트 테일러는 테일러상회를 열어서 자동차, 시계, 골동품 등을 취급하였다.
서울 앨버트 테일러 가옥은 1926년 7월에 낙뢰로 인한 화재로 1930년까지 재건공사를 하였고, 테일러 가가 1942년 일제에 의해 강제 추방된 이후에 1959년에 정치가 조경규(趙瓊奎)의 소유가 되었다.
1963년에 조경규의 재산이 국가로 넘어가면서 딜쿠샤도 국가 소유가 되었는데, 정부는 입주민을 그대로 방치하였고 입주민들은 임의로 이 건물을 증개축(增改築)하여 왔다.
2016년에 관계 당국이 딜쿠샤를 건립 당시의 모습으로 복원하는 데 합의하였고, 복원공사를 거쳐서 2021년 역사 전시관으로 개관하였다.
앨버트 테일러 가옥은 지하 1층과 지상 2층 규모의 붉은 벽돌 건물이다. 1층은 크게 세 부분으로 구성되는데, 가운데에 베란다, 거실, 벽난로, 계단이 있고, 왼쪽에 손님 등을 위한 3개의 방과 화장실이 있으며, 오른쪽에 부엌과 식당이 있다.
1층의 거실은 너비가 14m이다. 2층은 1층과 마찬가지로 세 부분이며, 가운데에 베란다, 거실, 벽난로, 계단이 있고, 왼쪽에 메리의 화실과 침실, 화장실, 오른쪽에 앨버트의 서재와 침실이 있다. 지하실에는 장작과, 석탄, 포도주 등을 보관하였다.
전체적으로 벽돌과 나무를 사용하였고, 벽돌과 모르타르를 절감하기 위하여 벽돌과 벽돌 사이에 공동(空洞)을 두어 벽을 쌓은 점이 주목된다.
창호는 오르내리기 창호와 여닫이 창호, 미서기 창호가 혼재되어 있으며, 바닥은 목조 마루이다. 앨버트 테일러 가옥은 이렇게 일제강점기 서울에서 살았던 서양인들의 생활양식을 담고 있다.
앨버트 테일러 가옥은 1920년대 서양 주택의 평면과 구조가 서울의 지형과 기술에 맞추어 이식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2017년 8월 8일 국가등록문화재(현, 국가등록문화유산)로 지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