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척 성북동 갈야산 유적 ( )

선사문화
유적
강원특별자치도 삼척시 갈야산(葛夜山)에 있는 삼국시대 독무덤 · 구덩식돌덧널무덤 등이 발굴된 무덤군.
이칭
이칭
삼척 성북동 갈야산고분군
•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통해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내용 요약

삼척 성북동 갈야산 유적은 강원특별자치도 삼척시 갈야산에 있는 삼국시대 독무덤·구덩식돌덧널무덤 등이 발굴된 무덤군이다. 발굴 조사 결과 중형급에 속하는 고분들이 상당수 분포하고 있었고 마구류, 위세품, 무기류 등의 유물들이 출토되었다. 특히 1987년에 출토된 굽다리접시와 긴목항아리는 5세기 중반경까지 올라가는 것으로, 지금까지 이 지역에서 출토된 유물 중 가장 빠른 것이다. 갈야산 고분군은 5~6세기경 삼척지역의 유력한 정치세력이 축조했을 것으로 보인다. 이 지역의 역사적 변동 상황을 반영하고 있는 가장 대표적인 신라 고분군이다.

목차
정의
강원특별자치도 삼척시 갈야산(葛夜山)에 있는 삼국시대 독무덤 · 구덩식돌덧널무덤 등이 발굴된 무덤군.
내용

강원특별자치도 삼척의 진산(鎭山: 나라의 도읍이나 읍치성의 뒤쪽에 있는 큰 산)으로 알려진 성북동 북편 해발 111.0m의 갈야산 일대에 위치하는 신라고분군이다. 1959년 삼척김씨 시조묘로 알려진 실직군왕릉(강원도 기념물, 1971년 지정)에서 북쪽으로 약 100m쯤 떨어진 농경지에서 돌무더기를 제거하다 토기편들이 발견되어 국립중앙박물관에서 고분 1기에 대한 긴급수습조사가 실시되면서 알려지게 되었다. 조사 전에 고분의 유구는 이미 파괴되어 정확한 구조나 규모, 유물의 위치 등은 파악할 수 없었다. 당시 출토유물로는 금제굵은고리귀걸이[태환이식], 유리옥 및 굽은옥[곡옥] 등의 장신구, 굽다리접시[고배] 및 발형토기 등의 토기류, 철제 말재갈과 심엽형말띠드리개 등의 마구류, 약간의 인골편 등이 있다. 당시의 조사 보고자는 출토유물과 유구 상황을 고려하여 5~6세기경의 신라계 돌무지덧널무덤[적석목곽묘]으로 추정하였다. 1987년에도 실직군왕릉 서쪽 약 100m 지점 아래에서 긴목항아리[장경호] 3점, 굽다리접시, 쇠도끼[철부] 1점 등이 출토되었다.

1995년에는 갈야산 정상부 일부와 동북쪽 사면을 포함하는 일대에서 상수도 배수지 확장공사를 실시하던 중에 고분이 파괴되면서 많은 토기편과 인골편이 발견되어 관동대학교 박물관에 의해 긴급발굴조사가 이루어졌다. 조사결과, 대부분의 고분은 독널무덤[옹관묘]을 제외하고는 모두 심하게 파괴된 상태로 확인되었는데, 구덩식돌덧널무덤[수혈식석곽묘] 및 앞트기식돌방무덤[횡구식석실묘] 7기와 독널무덤 2기 등 9기가 조사되었으며, 토기류 · 철기류 · 금제귀고리 등 약 50점의 유물과 다수의 인골편들이 출토되었다.

1995년 발굴된 고분들은 돌덧널[석곽]이나 돌방[석실] 위의 뚜껑돌[개석]과 봉분의 흔적이 확인되지 않았으며, 정상부를 중심으로 북쪽과 북동쪽 그리고 동쪽으로 이어지는 능선상에 등고선 방향을 따라 축조되었다. 경사면을 'L'자상으로 굴착한 묘광에 석회암 깬돌[할석]을 사용해 네 벽을 511단 정도 쌓았다. 매장주체부는 길이 300360㎝의 중형급과 270㎝의 소형급에 해당되는 것들이며, 평면 형태에 따라 세장방형과 장방형으로 구분된다. 바닥에는 점토와 소형 깬돌을 깔았으며, 일부는 둥글납작한 작은 냇돌을 깔아 주검받침[시상]면으로 이용하였다.

유물은 양 단벽에 마련된 부장칸이나 발치쪽과 머리쪽 단벽 부분에 주로 토기류를 부장하고, 철기류는 상면 중앙부의 장벽 부분에 붙여서 부장한 경우가 많다. 출토유물로는 굽다리접시 · 뚜껑접시[개배] · 짧은목항아리[단경호] · 긴목항아리 등의 토기류, 철촉 등의 무기류, 금제태환이식 · 금동제세환이식 등의 치레걸이[장신구]류, 쇠낫[철겸] · 쇠손칼[철도자] 등의 농공구류가 있다.

이 고분들 가운데 앞트기식돌방무덤으로 확인된 5호묘의 경우 시상면에 3~4인의 인골이 남아 있었는데, 이는 남서쪽 단벽에 설치된 횡구부(橫口部)를 통하여 시기차를 두고 몇 차례 추가장한 것으로 보인다. 또한 9호 옹관묘는 길이가 90㎝ 정도인데, 독내부에 주검받침 자갈돌을 깔았으며 어깨부분에 토기 2점을 부장하였고, 납작한 깬돌을 이용해 옹관의 아가리를 막은 구조를 보이고 있다.

지금까지 갈야산 고분군에 대한 고고학 조사는 일부 농경지 개간이나 개발공사 중 유물이 발견되어 긴급수습조사 차원에서 이루어졌기 때문에 현재로서는 고분군의 전체적인 규모나 그 성격을 정확히 파악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중형급에 속하는 고분들이 상당수 분포하고 있고 마구류, 위세품, 무기류 등의 유물들이 출토된 점을 감안할 때, 이 고분군을 축조한 집단은 5~6세기경 삼척지역의 유력한 정치세력일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1987년에 출토된 토기 중 굽다리접시와 긴목항아리는 그 연대가 5세기 중반경까지 올라가는 것으로, 지금까지 이 지역에서 출토된 유물 중 가장 빠른 것으로 편년된다. 이는 강릉 하시동고분군과 초당동고분군 출토유물 중 가장 이른 시기의 것과 비교되며, 아울러 경주 황남동과 미추왕릉지구 고분 출토유물과 같은 양상을 보이고 있어 경주 중심의 신라계 고분문화로 파악된다. 또한 6세기 중 · 후반경의 대가야(大加倻) 고령계토기가 일부 출토되어 대가야 멸망 이후의 대가야세력에 대한 신라의 사민정책 일면을 살필 수 있다.

의의와 평가

갈야산고분군은 삼척지역에서 가장 대규모로 조영된 중심 고분군이라는 점, 다양한 묘제 축조와 위세품 등 각종 유물이 출토되고 있는 점, 그리고 이 지역이 신라의 동해안 북변으로의 진출이 활발히 진행되었던 5~6세기경에 군사적 전략기지[수군기지] 및 요충지였다는 점에서 이 지역의 역사적 변동상황을 반영하고 있는 가장 대표적인 신라고분군이다.

참고문헌

『삼척의 고고문화』(이상수, 삼척시립박물관, 2012)
『한국고고학전문사전-고분편』 (국립문화재연구소, 2009)
『삼척 성북동 갈야산 고분군』(이상수 외, 관동대학교 박물관, 2003)
「삼척 갈야산 출토 신라토기」(김일기, 『강원사학』 4, 1998)
「삼척 갈야산 적석고분 개보」(최순우, 『고고미술』 138·139, 1978)
집필자
이상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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