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척 성북동 갈야산 유적 ( )

선사문화
유적
강원특별자치도 삼척시 갈야산(葛夜山)에 있는 삼국시대 독무덤 · 구덩식돌덧널무덤 등이 발굴된 무덤군.
이칭
이칭
삼척 성북동 갈야산고분군
목차
정의
강원특별자치도 삼척시 갈야산(葛夜山)에 있는 삼국시대 독무덤 · 구덩식돌덧널무덤 등이 발굴된 무덤군.
내용

강원특별자치도 삼척의 진산(鎭山: 나라의 도읍이나 읍치성의 뒤쪽에 있는 큰 산)으로 알려진 성북동 북편 해발 111.0m의 갈야산 일대에 위치하는 신라고분군이다. 1959년 삼척김씨 시조묘로 알려진 실직군왕릉(강원도 기념물, 1971년 지정)에서 북쪽으로 약 100m쯤 떨어진 농경지에서 돌무더기를 제거하다 토기편들이 발견되어 국립중앙박물관에서 고분 1기에 대한 긴급수습조사가 실시되면서 알려지게 되었다. 조사 전에 고분의 유구는 이미 파괴되어 정확한 구조나 규모, 유물의 위치 등은 파악할 수 없었다. 당시 출토유물로는 금제굵은고리귀걸이[태환이식], 유리옥 및 굽은옥[곡옥] 등의 장신구, 굽다리접시[고배] 및 발형토기 등의 토기류, 철제 말재갈과 심엽형말띠드리개 등의 마구류, 약간의 인골편 등이 있다. 당시의 조사 보고자는 출토유물과 유구 상황을 고려하여 5~6세기경의 신라계 돌무지덧널무덤[적석목곽묘]으로 추정하였다. 1987년에도 실직군왕릉 서쪽 약 100m 지점 아래에서 긴목항아리[장경호] 3점, 굽다리접시, 쇠도끼[철부] 1점 등이 출토되었다.

1995년에는 갈야산 정상부 일부와 동북쪽 사면을 포함하는 일대에서 상수도 배수지 확장공사를 실시하던 중에 고분이 파괴되면서 많은 토기편과 인골편이 발견되어 관동대학교 박물관에 의해 긴급발굴조사가 이루어졌다. 조사결과, 대부분의 고분은 독널무덤[옹관묘]을 제외하고는 모두 심하게 파괴된 상태로 확인되었는데, 구덩식돌덧널무덤[수혈식석곽묘] 및 앞트기식돌방무덤[횡구식석실묘] 7기와 독널무덤 2기 등 9기가 조사되었으며, 토기류 · 철기류 · 금제귀고리 등 약 50점의 유물과 다수의 인골편들이 출토되었다.

1995년 발굴된 고분들은 돌덧널[석곽]이나 돌방[석실] 위의 뚜껑돌[개석]과 봉분의 흔적이 확인되지 않았으며, 정상부를 중심으로 북쪽과 북동쪽 그리고 동쪽으로 이어지는 능선상에 등고선 방향을 따라 축조되었다. 경사면을 'L'자상으로 굴착한 묘광에 석회암 깬돌[할석]을 사용해 네 벽을 5~11단 정도 쌓았다. 매장주체부는 길이 300~360㎝의 중형급과 270㎝의 소형급에 해당되는 것들이며, 평면 형태에 따라 세장방형과 장방형으로 구분된다. 바닥에는 점토와 소형 깬돌을 깔았으며, 일부는 둥글납작한 작은 냇돌을 깔아 주검받침[시상]면으로 이용하였다.

유물은 양 단벽에 마련된 부장칸이나 발치쪽과 머리쪽 단벽 부분에 주로 토기류를 부장하고, 철기류는 상면 중앙부의 장벽 부분에 붙여서 부장한 경우가 많다. 출토유물로는 굽다리접시 · 뚜껑접시[개배] · 짧은목항아리[단경호] · 긴목항아리 등의 토기류, 철촉 등의 무기류, 금제태환이식 · 금동제세환이식 등의 치레걸이[장신구]류, 쇠낫[철겸] · 쇠손칼[철도자] 등의 농공구류가 있다.

이 고분들 가운데 앞트기식돌방무덤으로 확인된 5호묘의 경우 시상면에 3~4인의 인골이 남아 있었는데, 이는 남서쪽 단벽에 설치된 횡구부(橫口部)를 통하여 시기차를 두고 몇 차례 추가장한 것으로 보인다. 또한 9호 옹관묘는 길이가 90㎝ 정도인데, 독내부에 주검받침 자갈돌을 깔았으며 어깨부분에 토기 2점을 부장하였고, 납작한 깬돌을 이용해 옹관의 아가리를 막은 구조를 보이고 있다.

지금까지 갈야산 고분군에 대한 고고학 조사는 일부 농경지 개간이나 개발공사 중 유물이 발견되어 긴급수습조사 차원에서 이루어졌기 때문에 현재로서는 고분군의 전체적인 규모나 그 성격을 정확히 파악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중형급에 속하는 고분들이 상당수 분포하고 있고 마구류, 위세품, 무기류 등의 유물들이 출토된 점을 감안할 때, 이 고분군을 축조한 집단은 5~6세기경 삼척지역의 유력한 정치세력일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1987년에 출토된 토기 중 굽다리접시와 긴목항아리는 그 연대가 5세기 중반경까지 올라가는 것으로, 지금까지 이 지역에서 출토된 유물 중 가장 빠른 것으로 편년된다. 이는 강릉 하시동고분군과 초당동고분군 출토유물 중 가장 이른 시기의 것과 비교되며, 아울러 경주 황남동과 미추왕릉지구 고분 출토유물과 같은 양상을 보이고 있어 경주 중심의 신라계 고분문화로 파악된다. 또한 6세기 중 · 후반경의 대가야(大加倻) 고령계토기가 일부 출토되어 대가야 멸망 이후의 대가야세력에 대한 신라의 사민정책 일면을 살필 수 있다.

의의와 평가

갈야산고분군은 삼척지역에서 가장 대규모로 조영된 중심 고분군이라는 점, 다양한 묘제 축조와 위세품 등 각종 유물이 출토되고 있는 점, 그리고 이 지역이 신라의 동해안 북변으로의 진출이 활발히 진행되었던 5~6세기경에 군사적 전략기지[수군기지] 및 요충지였다는 점에서 이 지역의 역사적 변동상황을 반영하고 있는 가장 대표적인 신라고분군이다.

참고문헌

『삼척의 고고문화』(이상수, 삼척시립박물관, 2012)
『한국고고학전문사전-고분편』 (국립문화재연구소, 2009)
『삼척 성북동 갈야산 고분군』(이상수 외, 관동대학교 박물관, 2003)
「삼척 갈야산 출토 신라토기」(김일기, 『강원사학』 4, 1998)
「삼척 갈야산 적석고분 개보」(최순우, 『고고미술』 138·139, 1978)
집필자
이상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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